반숙자 수필가

 
 

토우 인형을 선물 받았다. 되는대로 주물러 만든 것 같은 살결 거친 인형이지만 흙빛이라 그런지 바라보고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따스해지고 편안해진다. 요즘은 외출을 피하고 토우와 지내는 시간이 많다. 그런 날 저녁은 집안이 정리되어 있고 후회거리가 생기지 않으며 저녁 반찬이 맛깔스럽다.

어제는 서울에서 아이들이 다녀갔다. 풀 냄새 나는 들마루에서 고기를 구워주자 “아! 행복하다,”고 했다. 다 커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아이들이 모처럼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으며 좋아하니까 나도 기분이 좋아서 “니네들이 행복하다니 나는 더 행복해” 그 바람에 식탁에는 웃음꽃이 가득하였다

인형을 보는 기쁨도 그와 비슷하다. 한 여인이 눈을 지그시 내려 뜨고 감미로운 미소를 짓고 있다. 그 미소는 사내 앞에서 색기를 드러내는 요염한 미소가 아니고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솟아나오는 맑은 미소다. 귀골스런 백자나 청자 인형도 못된 주제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미소의 근원은 무엇일까.

온종일 숙제를 풀듯이 살펴보다가 저녁때서야 해답을 찾았다. 자모상! 미소에 마음을 빼앗겨 보고도 보지 못한 품에 안긴 아기 모습, 그러면 그렇지, 자식을 품에 안고 젖을 물린 어미의 심정을 아는 이만 알리라. 여인은 유선을 통하여 아기에게로 흘러가는 모정으로 저토록 흐뭇한 표정일 것이다.

저고리 섶 밑으로 드러낸 풍만한 유두를 조각가는 에로틱하게 표현했는데도 야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모자상이기 때문일까. 오히려 넘쳐흐르는 기운이 강한 어머니 상을 느끼게 한다. 도자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형태이다.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로 작가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상 그 안에 씩씩하고 당찬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고 표현한 것 같다.

내가 산다무키라는 여인을 만난 것은 미얀마에서다. 양곤의 만달레이 힐에는 많은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부처상이 아닌 그 여인상 앞에서 발길을 멈춘 데는 이유가 있다. 앞 동굴의 부처님을 향해 두 손으로 선물을 바쳐 올리고 있는 여인.

먼 옛날 그곳에 부처님이 오셨다. 왕으로부터 고관대작, 서민에 이르기까지 향과 등불, 차, 꽃, 등 공양물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려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산다무키는 드릴 것이 없었다. 무엇인가 드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몸을 팔아 겨우 살아가는 기녀의 처지로 막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생각다 못한 여인은 자신의 유방을 베어 두 손에 받쳐 들고 나갔다.

부처님은 산다무키의 공양을 어떤 심정으로 받으셨을까, 육신은 순결하지 못한 기녀였으나 정신은 순결하고 부처님을 향한 흠숭은 누구보다도 간절하였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공양을 식사를 하는 것으로 알았으나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부처님이나 스님들께 공양을 하는 것은 면죄 되고 복을 받기 위함이기보다는 마음을 돌려 참회하고 진실된 참회를 불전에 고하는 의미라고 한다. 공양이란 보시와 깊은 연관이 있다. 보시는 자비를 베푼다는 뜻이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는 재시 <財施>를, 마음이 풍요롭지 못한 이에게는 법시<法施>를. 두려움에 차있는 사람에게는 무외시<無畏施>를 베푸는 것이 참된 공양이라 한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바랄 때는 참다운 보시가 아니다. 성경에도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 했다. 무상보시, 부모가 자식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그런 마음,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 참다운 보시오 공양이 아닌지. 하느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순교자로 숭앙하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기꺼이 공양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밥이 되어주라고 하신 김수환 추기경 님의 말씀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다.

산다무키가 바라보고 있는 부처님 전에는 꽃병이 즐비하다. 먹을 것도 풍족하지 않는 나라에서 가는 곳마다 불상과 탑 앞에 꽃을 바치는 불심을 본다. 종교거나 예술이거나 순수한 것일 때 아름답다.

기녀 산다무키를 보고 내려오는 길에서 깊은 상념에 빠졌던 것은 돌아다본 내 삶의 내용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헐고 남루한 이 영혼 정갈하게 씻어 바칠 님은 어디에 숨어 계신지, 신께 자기를 바친 여인의 순절이 가슴에 연꽃으로 피어나던 하루였다.

이 목숨 마치는 날 한 생이 조용한 공양이라면 이승의 잘못을 용서받고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空의 바다에 이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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