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명 자 수필가

 
 

꽃이 지는가 싶더니 잎이 피기 시작한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여백에 연둣빛이 물들더니 푸른빛은 하루가 다르게 영역을 넓혀 오월의 푸름은 빈 곳을 모두 메워버렸다.

집안으로 싱그러움을 들이기 위해 대청소를 시작했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침대 밑이며 장롱 속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던 물건들이 하나둘 밖으로 불려 나왔다. 물건들이 제자리를 잡아 앉았다. 앞 베란다 한쪽 벽면에 물건 받침대 역할을 하는 작은 문서함이 눈길을 잡는다. 주택의 좁은 베란다는 창고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함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탄탄한 것이 어른 무릎 높이의 다섯 칸의 층을 이루고 있었다. 아버님 생전에 소지품이나 지필묵을 담아 두었던 것이다.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덧문에 달린 동그란 문고리를 당겼다. 덧문을 열자 서랍들이 입을 앙다물고 포개져 있다. 차례로 문고리를 당겼다. 그동안 무심함에 시위하듯 삐걱거리며 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는다.

서랍 속에는 아버님이 쓰신 여러 권의 일기장, 종가의 제사가 있는 날이면 지방을 쓰기 위해 필요했던 책력이 여러 권 있었다. 책력은 아버님의 소천으로 1996년의 것이 마지막 권이 되었다. 도장과 인주가 함께 연결된 인감도장 등이 밖으로 나와 햇살과 만났다. 한문을 가끔씩 넣어 작성한 일기장은 그 날 날씨와 가족들의 일과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제에 다녀온 내용, 모심기와 추수하던 날 일꾼들의 숫자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다. 옛이야기가 주마등처럼 스친다.

마지막 칸의 문을 열자 은빛으로 반짝이는 동그란 회중시계, 일명 주머니 시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삼 십 오년 전 내가 아버님께 생신 선물로 사드렸던 것이다. 반가움에 시계의 뚜껑을 열었다. 옛 시간을 간직한 채 눈을 감고 잠들어 있다. 자유의 여신상 문양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고 시계에 줄이 달려있다. 생전에 아버님은 겉저고리 단추 구멍에 걸어 사용하셨다. 가끔은 허리춤에 걸어 바지 주머니에 넣기도 했다.

시계를 보고 있자니 아버님과 함께했던 시간이 다가왔다. 하얗게 눈이 내린 날, 졸린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나왔다.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한가득 데워놓고 기다리신다. 우리는 부엌에서 한 팀이었다. 미리 삶아놓은 보리쌀을 밥솥 아래 깔고 씻은 쌀과 불린 콩을 위에 얹어 밥물을 잡는다. 솥뚜껑을 덮으면 아버님은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오른손으로 풍구의 물레를 잦고 왼손은 왕겨를 적당량 흩뿌린다. 솥에 김이 오르고 끓기 시작하면 풍구질을 멈춘다. 그리곤 양념에 필요한 마늘, 파, 채소 등을 다듬어 가지런히 놓고 잠시 기다린다. 밥에 뜸을 들이기 위해 다시 풍구를 돌려 한 번 더 약한 불을 드려준다. 그동안 나는 석유곤로의 심지를 올려 불을 붙인다. 된장을 끓이고 나물도 몇 가지 정성 들여 준비한다.

종부의 부족함은 일 년에 열세 번 모시는 제사 준비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머님을 도와 준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툴고 긴장되었다. 제사는 대부분 겨울에 많았다. 재래식 부엌은 추위로 인해 준비과정이 힘들었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모르는 것을 유머를 곁들여 가르침을 주셨다. 삼대로 이어진 가족과 사촌들까지 열 명이 넘는 대가족이 함께 생활했다. 아버님은 어느 날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사대봉사 중 부모님 기일을 뺀 나머지(조부, 증조, 고조) 기제사를 한식날 한 번에 지내자는 의견을 내셨고 우리는 대환영했다. 그렇게 간편하게 바뀐 제사는 이제 일 년에 다섯 번으로 줄었다. 아버님의 사랑과 배려 덕분에 이제는 경험까지 보태져 제사준비는 고수가 되었다.

시계 옆에 달린 작은 나사를 살짝 당겨 태엽을 감는다. 한 바퀴 두 바퀴 충분히 감아주었다. 그러자 찰칵찰칵 시곗바늘이 움직인다. 잠자던 시간이 깨어나고 아버님의 시간에서 나의 시간이 되어 흐른다.

현대사회는 핵가족 또는 단독가구의 편리함이 우선이고 자기중심적 사회이지만 작은 불편함은 있었으나 대가족이 함께했던 지난 시간의 정이 그립다. 또한 부모님과 함께했던 시간이 소중한 추억으로 각인되었듯 앞으로 나의 시간 또한 자녀들에게 그리움으로 남는 삶을 전해주고 싶다.

5월은 아름답고 가족의 소중함이 다가오는 달이다. 떨어져 살아도 가족의 끈은 단단해서 짬을 내어 만나고 서로의 안부로 빈 가슴을 채운다. 오늘은 나뭇잎이 무성해지는 만큼 아버님을 향한 그리움도 커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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