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환 강동대학교, 사회복지행정과 교수

 
 

얼마 전 2015년 전북교육청에서 발행한 ‘탈핵(脫核) 교재’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서울대 원자력정책센터의 ‘탈핵 교재 되짚어보기’라는 책이 출간되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한마디로 원전의 위험을 근거도 없는 허위사실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보도 내용만 본다면 교육청이 어찌 저리 거짓을 학생들에게 알려줄 수 있을까? 하는 분노가 일어날 정도였다. 이를 보며 갑자기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동양고전 중에 빠질 수 없는 것에 사서(四書)가 있다.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그리고 중용(中庸)이다. 논어와 맹자는 각각 공자와 맹자의 어록을 기록한 것인 반면, 대학과 중용은 예기(禮記)라는 또 다른 고전 중의 일부분이었다. 그러던 것이 중국 송나라 당시 유학(儒學)이 성리학(性理學)으로 발전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별도의 책자로 만들어져 고전(古典)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이들 사서(四書)를 읽는데 있어서는 하나의 규칙이 있다. ‘대학-논어-맹자-중용’의 순으로 읽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를 정한 분이 율곡(栗谷)선생이시다. 대학과 중용은 예기에서 부분을 발취하였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주 짧은 분량의 책이다. 대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많이 알고 있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平天下)은 지역을 잘 이끌어야 하고(治國), 지역을 잘 이끌고자 하는 사람은 집안을 화목하게 하여야 하며(濟家)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여야 한다(修身).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마음을 바르게 하고(正心), 지극히 성실하게 공부를 하여야 한다(誠意). 궁극적으로 올바른 지식을 익혀야 하며(致知), 이는 사물의 이치를 바로 아는데 있다(格物). 이를 다시 역순으로 설명하는 것이 책의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한마디로 사실관계 혹은 인과관계를 올바르게 공부하는 데 최선을 다하여 ‘본인-가정-지역-국가’등의 순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중용(中庸)은 말 그대로 어디에 치우침이 없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율곡은 바로 사서(四書)의 순서를 정함으로써 학문의 기본을 밝히고 있다. 사서(四書)의 순서에서 ‘논어와 맹자’대신에 그 어떤 학문 혹은 사상을 집어넣어도 손색이 없다. ‘대학-oo-중용’ 순(順)은 모든 학문이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일 것이다. 사실관계 혹은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앎을 밝혀가면서도 한쪽에 치우침을 경계하라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따지고 보면 ‘탈핵 교재’와 같은 문제는 바로 대학과 중용의 기본 가치를 망각한데서 출발한다. 앎의 기본이 되어야 할 사실관계 혹은 인과관계에 대한 고려 없이 자신들의 주의·주장에 치우친 결과일 것이다.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가 등장하고, 21세기 지식상대주의와 문화상대주의가 확산되면서 과거 진리를 향한 학문의 발전이라는 인식과 선진과 후진이라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평가기준이 상실하게 되었다. 지식상대주의는 지식이라는 것은 현재적 가치 하에서 의미가 있을 뿐 패러다임의 변화가 발생한다면 그 가치는 한낱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치 과거 천동설 하에서의 지식이 지동설로 전환되면서 그 가치를 상실하였던 것은 이의 좋은 예라는 것이다. 또한 각 문화는 그 자체의 고유한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 선악(善惡)으로 평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문화도 그 고유의 논리와 가치가 있으며, 이를 특정 기준을 근거로 평가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진리와 보편적 가치에 대한 존경이 상실하면서 각 사상과 문화에 대한 완고한 교조적 태도가 자리잡게 되었다. 이를 부추기는 정치세력들에 부합한 국민들은 정파적 이해에 결합한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한다. 한마디로 동일한 사건 혹은 현상에 대해서도 우리들은 이에 대한 ‘격물치지(格物致知)’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지하는 정파적 관점에 맞추어 해석하고 주장하고 있다. 자신들의 문화 혹은 가치에 대한 완고함과 함께 상대에 대한 적대감이 자리잡게 되었다.

바로 전북교육청의 ‘탈핵 교재’는 오늘날 교육과 학문의 타락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학문의 발전을 통해 사회와 자연현상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진일보한 진리에 대한 접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자유와 인권에 대한 향유(享有)와 억압(抑壓)에 대한 인류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관계와 인과관계를 통해서 현상을 파악하면서도 완고함이 아닌 포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서(二書),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이 오늘날에도 주는 교훈일 것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격물과 중용의 가치를 되살리는데서 출발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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