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자 수필가

 
 

저녁 산책길 풀벌레의 합창이 한창이다. 어떤 오케스트라가 저리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을까. 들녘의 황금빛은 더욱 깊어가고 과일은 본연의 색깔로 몸집을 불리고 있다. 곱게 물든 나뭇잎은 가을을 노래한다.

지난 봄 합창단원들과 품바축제 열림 식 무대에 섰다.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저마다의 방법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가사를 잊지 않으려고 수 없이 되뇌었다. 합창이 시작되고 화음에 맞춰 내 역할에 충실했다. 노래가 끝나자 무대를 향해 관중들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매주 월요일 저녁 합창을 배우러 간다. 종일 직장 일로 지칠 법도 한데 화음을 맞춰 노래하면 피로는 사라지고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40~70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교실에 모였다. 의욕만 앞선 초보자들은 잘해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리 쉽지 않다. 선생님은 등을 곧게 펴고, 가슴을 들고, 턱을 약간 아래쪽으로 당길 것, 의자의 등받이에서 떨어져야 한다고 어린아이 타이르듯 반복 설명이다. 두 시간의 연습이 끝날 무렵이면 음이 맞는 듯싶다. 선생님의 칭찬이 곁들어지자 목소리에 자신감이 붙고 신바람이 난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은 콧노래가 절로 난다. 그리나 일주일 후 화음은 제자리걸음부터다. 선생님의 속은 타고 우리는 목청을 돋우며 부르고 또 부른다.

어느 곳이든 분명한 자기 목소리가 필요함을 느낀다. 적당한 음으로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면 전체의 화음이 불안정하다. 몇몇 단원이 확실한 음으로 중심을 잡아주고 있어 다행이지만, 화음을 맞춘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우리의 생활도 합창을 하는 것과 많이 닮아있다.

얼마 전 추석에 시끌벅적한 가족들의 합창이 있었다. 시댁이 대구인 딸이 중간경유지인 이곳 음성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외 손주 두 녀석이 모처럼 외가에 와서 재롱잔치를 벌이고 그 모습에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길지 않은 놀이시간 녀석들의 심사가 틀어지고 심한 투정에 제 어미 아비가 쩔쩔맸다. 이때는 할미가 나설 차례다. 따뜻하게 옷을 입혀 달구경에 나섰다. 기껏 앞마당이지만 환한 보름달과 쏟아져 내리는 별들과 만났다. 녀석들은 여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별이 반짝여요”. “달님이 엄청나게 커요”. 라며 흥분한다. 나는 아이들이 오면 매번 달과 별을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 하룻밤을 묵고 딸 가족이 시댁을 향해 출발하자 뒤를 이어 아들 며느리가 손주 녀석을 데리고 들이닥친다. 마당에 들어선 여섯 살 박이 손자의 거침없이 지르는 우렁찬 목소리는 잠자던 집안의 고요를 깨운다. 아파트에 사는 녀석은 시골집에 오면 공놀이를 즐긴다. 실내에서 공을 주고받는 놀이를 하더니 그것이 재미없다면서 축구공을 들고 공원으로 나갔다. 제 할아버지와 나를 양옆 멀찌감치 세워놓고 공을 차며 자기에게 잘 차라고 진두지휘한다. 지칠 줄 모르는 녀석을 상대하기란 여간 고단한 게 아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데 집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는 듯하다. 어둠이 밀려올 무렵 얼레고 달래서 집으로 들어왔다. 무엇이 마뜩찮은지 녀석의 거침없는 고음에 며느리는 푸근한 저음으로 고음을 감싸 안으며 듀엣의 화음을 선물한다.

손주들이 태어나고 가족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소소한 소음들은 여러 번의 연습으로 조금씩 아름다운 하모니로 바뀌고 있다. 풀벌레의 화음을 닮은 가족들의 노래를 추석 연휴 며칠째 감상 중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 부부는 눈빛만으로도 가슴속 비밀이 열려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가족이라는 화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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