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자 수필가

 
 

갈대가 흔들린다. 등줄기에 반짝이는 볕을 업고 바람과 한 몸 되어 일렁인다. 갑자기 몰아친 바람에 땅에 닿을 듯 누웠다 일어선다. 거센 바람에 몸을 낮추는 삶의 지혜를 내게 몸짓으로 알려주고 있다.

제주도로 졸업여행을 왔다. 해안가 마을 둘레 길을, 느리고 더디게 걷고 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해안가를 지나 마을로 이어진 골목길로 들어섰다. 구멍이 숭숭 뚫린 돌담에는 바람이 쉼 없이 들락거린다. 태풍에도 끄떡없는 돌담은 소통과 배려도 함께 쌓인 듯했다. 앞만 보고 바쁘게 달리던 일상을 조금씩 내려놓는 연습 중이다.

퇴직자들에게 부여되는 사회적응 문화탐방 여행 제주도를 가기 위해 청주공항에 집결했는데 처음 만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열 한 명의 직장 동료들은 이번 여행을 자칭 졸업여행이라 했다. 우리만의 여유로움을 갖기 위해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한적한 오지를 찾아 떠나는 프로그램을 택했다. 퇴직을 목전에 둔 우리는 같은 나이라는 이유로 어려운 상 하 직급도 모두 내려놓았다. 그중 내가 가장 낮은 직급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 낯선 곳에서 잠은 쉬 오지 않고 직장에 처음 출근하던 때가 생각났다. 만학으로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 통계청에서 임시직 조사원을 뽑는다는 인터넷 공고문을 접했다. 원서를 내고 여러 가지 절차를 거쳐 합격을 기원하며 가슴 졸이던 일이 어제 일 같은데 시간은 빠르게 흘러 15년을 몸담았던 직장을 떠날 날이 채 두 달도 남지 않았다. 사십 중반에 시작한 직장생활은 배워야 할 것도 인내할 것도 많았다. 보람도 느꼈지만 몇 년 전 있었던 안타까운 그 일은 지금도 가슴에 남았다.

담당 지역 인근에 구제역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아침 뉴스로 접했다. 서둘러 마을을 찾았더니 입구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출입이 통제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하던 농가와는 전화 연락만 가능했다. 한 달간의 초조한 시간이 흐르고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구제역 발생 반경 안에 있던 표본농가는 전 재산이었던 한우를 하루아침에 매몰처리 할 수밖에 없었다. 통제가 풀리고 다시 찾은 농가에는 노모와 장애인 딸을 둔 아저씨의 한숨 소리뿐이었다. 한번 표본이 정해지면 오 년 동안 가족처럼 지내며 그 집의 경제를 조사하는데 어려운 가정형편을 알기에 더욱 안타까웠던 일이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농가에 도움을 주기 위해 농산물을 팔아주던 일, 자녀들의 취업에 함께 기뻐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한다. 부족한 나를 위해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주었던 남편에게 나의 남은시간을 할애하고 싶다. 이런 마음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로의 일터에서 앞만 보고 달리던 중 남편에게 갑자기 찾아온 건강의 적신호가 그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받은 것이 참 많았다. 엄마의 부재로 마음 붙일 곳이 없던 나는 어린 날 방황을 많이 했다. 열아홉 살에 만난 그가 내 편이 되어 줄 것 같아 스물한 살 되던 해 우리는 한편이 되어 결혼했다. 종가의 종손인 그 때문에 내 책임과 의무가 막중했고 나의 능력은 종부의 역할에는 한참이나 못 미쳤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이십 년 세월과 함께 많은 일이 익숙해졌다. 불혹의 나이가 넘도록 꺼지지 않은 학업의 열병을 앓고 있을 때, 묵묵히 곁에서 지켜보던 그가 도전할 용기를 주었다. 직장생활을 잘할 수 있게 도움을 준 숨은 공신도 그다.

졸업은 또 다른 시작이다. 남편의 건강이 청신호로 바뀔 때까지 우리는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이겨나갈 것이다. 때론 마음의 욕심이 웃자라 넘치고 부족해도 너그러움과 더 큰 사랑으로 포옹하는 법도 배울 것이다. 소소한 일상이 소중하게 다가오는 아침, 제주의 푸른 바다가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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