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일 목사(흰돌교회 담임목사.음성군기독교연합회장)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 간에 전쟁을 백년전쟁이라 일컫는다. 양측이 일전일퇴를 주고받으며 벌인 이 전쟁은 저 유명한 잔다르크라는 영웅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전쟁은 언제나 위대한 영웅이나 숭고한 교훈을 남기는 법, 백년전쟁 중에서도 잊지 못할 아름다운 교훈이 있다. 당시 프랑스의 칼레라는 도시는 시민 8000명으로 구성된 작은 도시였지만 영국의 정예병력 3만4000명을 무려 11개월 동안이나 막아내며 저항을 한다. 결국은 영국군의 막강한 화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항복을 하면서 칼레는 영국의 손으로 들어가고, 승리는 했으나 분노가 가시지 않는 에드워드3세는 칼레시민 전체를 몰살할 것을 명령한다.

이에 칼레의 항복사절단이 급히 파견되어 영국 왕에게 자비를 구하고 왕은 주민대표 6명을 교수형에 처하는 선에서 일단락 짓자며 나름 자비를(?) 베푼다.

과연 누가 교수대에 자원해서 올라야 할 것인가?

이 때 칼레의 최고부자 생 피에르가 앞장을 서며 나타나 소회를 밝힌다.

“칼레의 시민 여러분! 난 그동안 여러 분의 과분한 사랑을 받으며 최고의 삶을 살았습니다. 언제 그 사랑을 갚을 날이 올까하며 기다렸는데 그 기회가 왔습니다. 영광스런 죽음을 통해 그 동안 제가 받은 사랑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연이어 최고의 권력을 가진 시장이 나타나고, 상인대표 가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6명을 채우고 말았다. 처형 직전 영국 왕비의 간청으로 사형집행은 극적으로 정지되면서 칼레의 시민들은 환호하며 자신의 지도자들에게 한없는 존경을 품고 살아가게 된다. 훗날 저 유명한 조각가 로뎅이 만든 조각상 “칼레의 시민들”이란 작품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 아름다운 말을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맡은 자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필시 지도자란 누구를 말하며, 지도자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 나라의 지도자, 한 지역의 지도자는,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구약성경 전도서4장에 보면 지도자의 권세는 위로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지도자들이 많지 않다. 오히려 약자를 학대하며 무시하며 산다. 선거 때만 되면 연실 허리를 굽혀대며 표를 달라고 사정하다가 일단 자리에 오르면 권력을 행사하거나, 지배자로 변질된다. 그러니 약자들은 산자보다 죽은 자가 복되다거나, 죽은 자보다 태어나지 않은 자가 더 낫다며 사방에서 절규하게 되는 것이다.

지도자는 자신의 영달에 빠지지 말고 창문을 열어 오가는 힘없는 나그네들을 봐야 한다.

저마다 무거운 삶의 질고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지친 이웃들을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만의 풍요로운 삶에 안주하지 않게 되고, 쉽게 웃기 보단 오히려 자주 가슴을 치며 울게 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권을 잡은 정치인들이나 국회에 입성하여 의회정치에 몸담고 있는 의원들이 임기 내내 맡은 자의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했으면 한다. 유권자들에게 한 표를 구걸하다시피 하던 때를 쉽게 잊어버리고 허리를 곳곳이 편 채로 약자를 향해 호령한다면 그는 정치꾼이지 지도자가 아니다.

목회를 한다며 교인들을 줄 세우고 병정놀이하듯 호령하는 재미로 사는 목사가 있다면 그 역시 삯꾼이지 진정한 의미의 목자는 아니다. 필시 지도자란 약자의 삶에 아파하고, 희생의 순간엔 선두에 서는 사람이다. 그것이 지도자의 낙이라면 유일한 낙이다.

예수님은 절대자이며 전능자이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섬기며 위로하는 자비의 주님이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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