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전 청주고교장,칼럼니스트

 
 

(2) 충주중학교시절(1974-1978)

74년 충주중에 부임, 처음으로 학급담임을 맡고 전학년 반공 도덕 교과와 교도부에서 상담을 맡았다. 지금까지 줄 곧 사용하는 1. 솔선수범, 2. 책임완수, 3. 약속이행의 학급 생활 목표는 이 때 정해진 것이다. 전 교생을 상대로 부단히 상담을 계속하며 문제 학생을 개별 치료하는데 노력하고 학습 과제는 꼭 확인하고 마지막 한 명까지 받아내서 적당히 넘어가는 근성을 뿌리 뽑고 지시한 사항은 꼭 확인 처리했다. 매회 학급 심사에서 내가 맡은 학급이 5년간 몇 번을 제외하고는 성적, 수업료, 청소 등은 물론 종합 성적도 24개반 중 계속 해서 1등을 했다.(부상으로 금일봉 전달) 나중에는 교장선생님께서 “김선생, 모범학급 이제 다른 학급에게 양보 좀 하지”라고 농담까지도 하셨다.

교직생활 3년째 접어드는 74년 겨울방학 직원연수 때 교장 선생님이 “학급 운연 방안과 학생 지도”에 관해 발표하라는 하명이 떨어졌다. “이제 교직 경력 3년도 채 못되는 제가 선배 교육 동지 앞에서 외람 되게 무슨 말씀을 드리겠느냐”는 말로 발표를 대신했다.

74년 전임교(가금중) 제자들에게서 연이어 날아오는 서신인즉, 선생님께선 “꿈을 갖고 꼭 고교진학을 하라”하셨는데 가정 형편상 도저히 진학을 할 수 없으니 어쩌면 좋으냐는 하소연이었다. 이제 겨우 신접살림을 차린 나는 그들을 도울 힘은 없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답장을 쓰며 격려했다.

교직에 투신한 이후 계속해서 학생들에게 틈틈이 ‘승리는 참고 견디는 자에게 돌아간다’ “自强不息”, “盡人事待天命”, “破邪顯正”등의 座右銘을 써 주어 몸과 마음을 바로 갖고 정직하고 근면하며 창의성을 갖는 학생이 되도록 했으며 문제 학생과는 부단히 대화를 통해 그들을 이해하고 길갑이가 되도록 노력했다.

75년에는 고교입학을 할 수 없을 정도의 부진아와 문제 학생들로 구성된 특별 학급(3-4)을 맡았다. 5명 정도만 충주고에 합격시키면 성공이라고 했는데 충주고 이상선 합격이 12명이었고 전교에서 합격률이 가장 높았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75년 R.C,Y를 맡아 가로 청소 및 교내․외 교통 정리 활동을 통해 “질서의 생활화”에 힘쓰고 경로당, 고아원, 향토부대를 방문하여 봉사정신과 애국심을 고취하는데 노력했다.

76년에는 새마을을 맡아 직동 부락과 자매 결연 맺고 부락에 출장, 버섯 재배를 위한 기술지도, 1일 새마을 교실을 열어 교재(반공, 새마을, 기술 등), 영화와 민족 중흥관, 학습원 견학 등을 통해 국가관 확립과 기술 지도에 힘쓰고 친선 체육대회를 개최하고 노력 봉사활동을 통해 지역 사회의 문화센터로서의 역할을 다하도록 했고 담임 반이 무결석을 했다(2-4)

78년 담임 반에 김○○가 있었다. 1학년 때 처벌도 받고 전교에서 가장 지도가 어렵다고 인정받은 학생이었다. 가정환경이 불우했고 성적도 하위, 학교생활에는 취미가 없고 빗나갔다. 가까이 대화를 자주 나누며 잘한 일을 찾아 기회 있을 때마다 칭찬을 해 주었더니 생활태도에 변화가 오기 시작하고 성적도 점차 향상되어 우등생권에 들게 되었다. 교육은 끈질긴 지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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