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서거 200주년이 되는 조선시대 22대 왕 정조는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립해 스스로 학문 연마에 모범을 보이며 북학 사상을 적극 수용하는 등 완숙한 통치력으로 조선조 문치주의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그는 재위 24년간 혼신의 힘을 쏟아 모범을 보여 교화(敎化)를 통한 국가 기강의 확립에 전력 투구했다.
임금으로서는 드물게 「홍재전서」라는 (184편 100책) 방대한 문집도 남겼다.
그가 열한살 되던해 부친인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전대미문의 사건을 겪었고 세손에 책봉 되어서도 항상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일한 위안거리었던 밤샘 독서를 통해 자신을 지키는 한편 장래 통치자로서의 소양을 닦았다.
이십년쯤 전에 정조가 열세살 왕세자 시절에 할아버지 영조의 생일날 쓴 시 한편을 구했다.
오랫동안 두고 보아도 왕손의 당당함과 귀함이 느껴져 잘 간직하고 있다. 그것으로 인해 정조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관련 책자도 모아 보았다.
정조는 학자 군주로 자부하며 평생 책을 가까이하며 조선후기 문예부흥을 이룬 성군이다.
정조의 이름은 산(蒜)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영조의 손자요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혜경궁 홍씨다.
11세때 장헌세자가 참화를 당한 뒤 왕세손으로 동궁에 책봉되고 영조51년 대리청정 하다가 다음해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 하였다.
정조는 1800년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그는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빛나는 업적을 이루어 냈으며 특히 일득록(日得錄)은 정조의 말씀을 신하들이 기록해 놓은 일종의 수상록으로 오늘 우리에게도 귀담아 들어야 할 귀한 말이 많이 담겨있다.
“말은 택하여 하지 않으면 안되고 마음은 굳건히 하지 않으면 안되고 뜻은 고원하지 않으면 안되고 도량은 넓지 않으면 안되고 일은 착실하지 않으면 안되며 배움은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기미란 움직임의 조짐이다. 움직임은 나타나는 것이므로 선악의 기미는 진실로 큰 것이다. 매사에는 각각 기미가 있지만 사람이 알지못할 뿐이다. 깨닫지 못하는 것 중에 기미는 이미 싹터 있으니 그러므로 배우기를 좋아 하는 자는 먼저 기미를 살펴 머무르게 하거나 막아야한다.”
“옛 사람은 몸을 착하게 하는 것으로써 고요하게 지냈고 사귐을 적게하는 것으로써 삼갔다. 몸이 착하면 재앙이 없고 사귐이 적으면 근심이 없다.”
홍재전서 권120에 실려있는 “추서춘기”는 정조의 명을 받은 규장각신 김근순이 맹자(孟子)를 보다가 의심나는 부분에 대해 질문하면 정조가 종이에써 대답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추서는 맹자를 말하며 봄에 과제로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추서춘기라 한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수원성을 쌓았는데 2년반에 걸쳐 86만냥을 썼다.
자세한 내역이 책으로 남아있어 그가 꿈꾸었던 신도시의 면모를 잘 알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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