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명 자 수필가

 
 

맑은 공기가 상쾌하다. 오랜만에 마을 뒷산을 오른다. 숨이 턱에 차올라 걸음을 늦추는데 옆에서 툭 하고 묵직한 소리가 들린다. 굵은 알밤이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알밤을 집어 드는 순간 세상을 다 얻은 느낌이다. 산초나무 열매는 까만 꽃송이를 다복하게 달았다. 개 복숭아도 용케 사람 손을 피해 제법 굵다. 산기슭 곳곳에서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며칠 전 농사를 짓는 이웃으로부터 올 농사가 마무리되었으니 필요한 만큼 끝물 고추를 따 가라는 연락이 왔다. 시골 생활에서나 맛볼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 이삭줍기다. 서둘러 적당한 소쿠리를 챙겨 들고 밭으로 갔다. 철을 잊은 고추 꽃은 하얗게 피어 벌 나비가 연신 날아들고 있었다. 꽃 진자리에 맺힌 여린 고추는 몸집을 키우느라 안간힘을 쓰고, 가지마다 굵고 파란 고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넉넉함과 감사함이 함께 열렸다. 이웃의 정까지 듬뿍 담아 소쿠리에 제법 많은 고추를 따 담았다. 단단한 고추는 삭혀서 동치미에 넣고, 여린 것은 초고추 용이다. 일부는 송송 썰어 냉동실에 얼려 겨우내 된장국에 넣어 먹을 참이다. 남은 것은 가루를 묻혀 한소끔 쪄 가을볕에 말려 이웃과 나눌 생각이다.

고추밭을 둘러보니 농부의 수고로움이 느껴진다. 농사를 짓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을까. 3월이면 시작되는 고추 농사를 위해 아저씨는 하루도 편히 쉬는 날이 없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내 고추농사와 씨름하며 수확한 고추를 건조하여 내다 팔았지만 예년만 못한 고추 값에 올해도 아저씨 주머니는 가볍다고 했다. 이런 형편에 고춧대를 뽑아두면 저절로 익어 희나리 고추라도 건질 수 있을 텐데 끝물이라며 선선하게 내어준 아저씨의 마음이 가을을 닮았다.

얼마 전 앞만 보고 달리던 직장에서 나는 퇴직을 했다. 그동안 하고 싶던 운동과 취미생활로 하루를 보내던 중, 어린이들이 숲에서 자연과 더불어 호연지기를 키우는 교육으로 ‘유아숲지도사’를 개강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오래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터라 삼복더위가 기성을 부릴 때 땀을 닦으며 달려가 등록을 했다. 집에서 왕복 4시간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처럼 지금은 숲에서 실습 중이다.

어린이들의 호기심은 무엇 하나 허투루 보는 것이 없다. 연신 질문 공세다. 가장 쉬운 답을 찾으려 애를 쓰는데, 그들은 벌써 술술 답을 한다. 숲에서 대화는 자유롭다. 구름과 바람이 곁으로 다가서고 이름 모를 새들이 연신 말을 걸어온다. 풀벌레 소리에 주변을 살폈다. 벌새다. 아니 벌새를 꼭 닮은 박각시나방이다. 코스모스군락에서 꿀을 찾아 바쁘게 날고 있다. 긴 주둥이를 꽃술에 꽂고 정지 비행을 하며 꿀을 따는 모습이 우아하고 아름답다. 긴 더듬이가 꼿꼿이 서 있어 새가 아닌 곤충임을 알려준다.

어린이들은 자연과 더불어 무궁무진한 호기심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 소중함을 가슴에 담는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감성은 늘 살아 숨 쉴 것이다. 자연스럽게 친구를 돕고 배려하는 모습에 나는 손자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빛으로 그들과 행복을 공유한다.

내가 이리 배움에 목말라하는 것은 제때 무엇 하나 제대로 배워 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배움도 때가 있다’라고 했는데, 유년의 내 처지가 그렇지를 못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가족들이 오순도순 둘러앉아 정을 나누는 평범한 일상도 나는 그곳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방인이었다. 내 유년은 잿빛으로 물들었지만, 스스로 배움의 길을 찾아 나선 지 수십 년, 이제는 그 배움을 나눠야 할 때가 왔다. 그중의 하나가 요즘 유아들의 세계를 탐색하며 자연과 하나 되어 내 어린 시절을 선물로 돌려주려는 계획도 포함된다.

가장 편한 복장으로 신발 끈을 조인다. 다음 수업을 위해 어린이들이 다닐 숲길을 답사하러 나섰다. 숲길 건너편 높은 나뭇등걸에 말벌 둥지 두 개가 노란 달처럼 걸려있다. 까맣게 붙어 있는 벌들의 움직임이 겨울 양식 준비로 바쁜 것 같다. 벌은 건드리지 않으면 위험하지 않기에 안심을 하고 길을 막고 있는 나뭇가지를 치운다.

넉넉함에 사랑까지 가득 담아 앞으로 숲에서 어린이들과 함께할 내 인생의 이삭줍기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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