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자 수필가

 
 

헤어짐은 또 다른 만남의 시작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장 남은 달력이 나를 보고 웃고 있다. 올해도 수고했다는 격려 같다. 벌써 12월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으니 곧 헤어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달력 인심이 후하다. 며칠 전 인근 축협에서 큼지막한 새해 달력을 받아왔다. 한 장 남은 달력이 가벼워 위에 겹쳐 걸었다. 걸어놓고 바라보니 양력과 음력 표시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붉은색과 파란색 동그라미 안에 동물 그림이 있다. 축산농가에서 사용하는 달력으로 어미 소에게 인공수정한 날과 송아지가 태어날 예정일을 표시한 것이라 한다. 축산농가의 일상들이 그려진다.

그와 비슷한 크기의 달력이 건넌방에도 걸렸다. 광천 새우젓 시장에서 가지고 온 것인데 물때를 알려주는 기록이 자세히 적혀 있다. 1물에서 11물, 한객기, 대객기, 사리, 조금 등 바닷가의 생활예보다. 태양과 달이 상대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따라 조석 현상의 차이가 나타나는 기록이다. 산간지방이나 바닷가 사람들 모두 자신이 처한 환경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물때에 맞춰 잡히는 고기의 종류에 따라 어망을 준비하는 어부들의 일상도 그려졌고, 건강한 소를 키우는 것이 목적이지만, 구제역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한 축산 농가도 생각났다. 말끔한 달력을 방바닥에 펼쳐 놓고 연중 기억해야 할 날짜부터 적어나갔다. 가족들의 생일, 집안 애경사 조세 납부 날짜까지 꼼꼼히 기록했다. 새해에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식탁 위에 놓인 올해의 탁상용 달력을 돌아봤다.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봉사단체 회원들과 5년째 매월 찾아가는 요양원이 있다. 그곳을 방문한 날짜가 가장 많았다. 어르신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준비해간 도구도 다양했다. 마술을 보여드리고 함께 손뼉 치고 노래도 불렀다. 손 마사지가 끝나고 빨간 매니큐어를 발라 드리면 아이처럼 환하게 웃는다. 매월 만나는 분들 중 더 이상 뵙지 못하는 분도 있어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달력 속에는 내 시간이 무척 느리게 흐른 적도 있었다. 그동안 집착이라 할 만큼 의미를 둔 것이 나만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다. 며칠을 굼벵이처럼 어둠에 묻혀 있다가 어스름한 천변 길로 나섰다. 한참을 걷다가 물가 벤치에 앉았다. 수면위로 비친 불빛이 흔들린다. 목석처럼 굳은 그림자 위로 시간이 흐르고 불빛이 빛을 잃을 즈음 물속에 달이 떴다. 달빛이 맑다.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생각을 조금씩 내려놓을 때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흐르는 냇물이 강으로 바다로 쉼 없이 흐르듯 생각의 사유도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옷깃을 여미고 달빛의 배웅을 받으며 일어섰다. 파르르 떨리던 가슴도 제자리를 찾았다.

며칠 후면 새해다. 새 달력에서 만난 축산농가 일상과 파도가 넘실대는 삶의 현장에서 바다와 맞서 치열하게 사는 바닷가 사람들처럼 내가 살아가는 방법도 환경이 다를 뿐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나간 일들은 중요하지 않다. 삶이란 흔들리며 피는 꽃이다. 현실의 익숙함과 편안함에 안주하기보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로 희망을 꿈꾼다. 조금은 흔들렸지만 곧고 바로 서는 모습이고 싶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나는 일찍 걸어둔 두툼한 새 달력에 눈길을 준다. 새해는 그곳에 행복과 웃음이 가득 담기는 날들로 채우겠다고...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음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