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수필가

 
 

대견하기도 하지. 차갑고 단단한 얼음 천장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진흙 속에서 벌였을 생사의 사투를 생각하니 이리도 짠할 수가 없다. 지난해 월동 채비에는 제일 먼저 연못에 물을 공급하는 수도를 막는 일이었다. 동파를 막기 위해 꽁꽁 싸맨 수도를 며칠 전 풀어 보았다. 얼마나 살아 있을까하는 걱정에 연못의 호수에 물을 틀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역시 빨간 금붕어들이었다. 그리도 많던 금붕어는 눈에 띄게 줄었다. 다행히 민물붕어는 그 수에 차이가 없는 걸 보니 생명력이 더 강한 듯하다. 넓은 호수는 활동공간이라도 있다지만 우리집 연못은 시멘트로 만든 탓에 해가 갈수록 금이 가서인지 물을 넣어주지 않으면 물빠짐이 심할 수밖에 없다. 고기들이 해엄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터이다. 아마도 진흙의 뻘 속에서 고통의 겨울을 보냈으리라.

봄이다. 자연은 이제 완연한 봄빛으로 여기저기에서 생명이 움트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음껏 봄을 누릴 수가 없다. 한껏 움츠러든 어깨도 펼 수가 없다. 언제쯤이면 이 겨울이 끝날 수 있을까. 의학이 발달했다는 21세기에 이 무슨 역병이란 말인가. 어쩌면 전염병이 속수무책으로 퍼졌던 그 옛날 지게송장으로라도 장사를 지낼 수 있었음을 부러워해야 할 지경이다. 지금은 가족조차도 시신을 볼 수도 마주 할 수도 없어 이승에서의 제대로 된 마지막 배웅도 할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평범했던 지난 시간들이 이리도 소중하게 생각되니 말이다. 하다못해 지인들과 카페에서 수다를 떨었던 소소한 즐거움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다시금 깨닫는다. 혼자서 차를 마시고, 혼자서 산책을 한다. 바쁜 일상에 쫓겨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누리고 싶어 홀로 여행을 떠나곤 했었다. 군중속의 외로움이라고 했다.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과의 관계에서 멀어지고 싶은 욕망에 그런 꿈을 꾸곤 했다. 하지만 막상 그런 일들이 지금 이렇게 내 일상이 되어버리니 왜 지난날의 그 소소한 일들이 다시금 그리워지는지 모르겠다.

앉아있는 자리가 꽃자리라고 했다. 마음먹기에 따라 불행도 행복도 따라 붙는 법임을 왜 몰랐을까. 요즘 법륜스님의 《인생수업》을 탐독하는 중이다. 스님은 원효대사의 일화를 통해 마음자리의 중요성을 알려 주신다. 원효대사가 비를 피하기 위해 들었던 동굴에서 단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에 보니 그곳이 누군가의 무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튿날 잠을 자는데 자꾸 귀신이 나타나 잠을 설친 것을 보고 원효대사는 깨달았다고 한다. 똑 같은 무덤이었지만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그 마음은 한마음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벗어놓은 옷에 집착하지 마라’, 법륜스님은 죽은 사람의 육신은 낡은 옷이라고 하셨다. 때문에 장례의식은 산사람의 문제이지 영가(靈駕)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전염성이 강한 코로나19로 사망한 가족을 대면할 수 없음에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하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19로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들에게 법륜스님의 이 말씀이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앞날이 안개로 자욱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엄습을 한다. 그래도 우리는 견디며 자숙의 시간을 갖아야 한다. 자업자박(自業自縛), 자연은 그동안 수없이 우리에게 많은 경고를 해 왔다. 지금의 이 사태는 예견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디 자연이 겨울을 어떻게 견뎌내는지를 다시금 배우고 깨우쳤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 모두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서로를 이어주는 관심과 따뜻한 말 한마디의 격려는 이 긴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 머잖아 우리 앞에 펼쳐질 꽃자리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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