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명 자 수필가

 
 

공기가 맑다. 손톱만큼 작던 나뭇잎이 주말을 보내고 왔더니 손바닥만큼 커졌다. 봄비가 내려 대지를 흠뻑 적셔준 이유도 있었다. 나는 수목원으로 향하는 언덕길로 접어들었다.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잎 연주에 맞춰 새들의 노래는 숲을 깨웠다. 돌 틈에 겨우 뿌리 내린 노란 민들레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슬방울을 매단 꽃이 나를 향해 씽긋 웃어 준다. 한 송이 꽃에도 생명이 가득 차 있다. 초록 물감을 풀어놓은 듯 빈틈없는 숲은 온갖 꽃이 피어나고 열매를 맺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들의 생존도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수목원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참나무 연리지가 우뚝 서 있다. 나는 자주 이 길을 오가며 그 나무에 눈길이 한참씩 머문다.

오래전 같은 종류의 어린 두 나무가 가까이에 싹을 틔웠다. 둘은 경쟁하듯 표피를 넓히고 볕을 향해 키를 키웠다. 너무 가까이 서 있던 두 나무는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바람에 수없이 흔들리면 부딪쳤다. 살갗이 벗겨지고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천둥과 번개도 아픔을 보탰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말없이 상대의 아픔을 바라보던 눈이 순해졌다. 가슴에 애처로움이 깃던 어느 날, 두 나무는 상처를 비비며 서로를 보듬었다. 바람과 햇살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하나 된 나무는 상처가 아물고 흔적은 옹이로 남았다.

연리지의 모습에서 부부의 연으로 사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는 저렇듯 상대의 아픈 상처를 보듬어 안아 주었는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랑 하나면 세상 두려운 것이 없다고 큰소리치며 결혼을 했다. 43년을 함께 걸어오면서 녹록치 않았던 삶 안에는 위기와 절망의 징검다리도 있었다. 밥벌이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퇴직을 했다. 그동안 여유가 없어 못 했던 일들을 함께하며 지내자고 의기투합했다. 이제는 맑은 날만 계속될 것이라 확신하던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온 몸의 이상 신호에 우리는 당황했다.

3년째 투병 중인 남편의 심중을 헤아린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에게 진정한 휴식처가 되고 있는 걸까! 남편은 오늘도 두려움을 애써 외면한 채 마을 뒷산을 오른다. 나는 이제 그의 보호자가 되었다.

내 것을 양보하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하나가 될 수 있다. 당당히 서 있는 연리지는 이제 두려울 게 없는 듯하다. 천둥과 번개의 위협도 일 년이며 몇 차례씩 몰아치는 태풍도 의연히 감내한다. 서로는 공동의 공간에서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넉넉한 마음은 곤충과 새들에게 집터도 내어주었다. 봄부터 꽃 피워 열매 맺는 가을이면 숲속 동물들의 양식도 공급한다. 이곳에 유난히 많은 다람쥐는 그의 배려 덕분이다.

자연은 자신을 위해 작은 것을 취하고 많은 것을 모두에게 나눈다. 눈 앞에 펼쳐진 자연은 모두 스승이었다. 오늘도 마음속에 욕심이 비집고 들어오면 스치는 바람이 나를 일깨우는 듯하다.

어린 왕자가 사는

작은 별에 씨앗 하나 날아와 꽃을 피웠다.

처음 본 꽃에 심장이 심쿵한 왕자는 정성껏 꽃을 돌봤다.

꽃은 고운 자태만큼이나 아름다운 향기로 별을 채웠다.

그러나 어린 왕자는 그 향기를 느낄 수 없었다.

꽃의 까탈스런 성격과 가시 돋친 말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기 때문이다.

왕자는 결국 꽃을 두고 별을 떠났다.

여러 개의 작은 별을 돌아 지구에 온 왕자는 장미 정원을 보고 울었다.

우주에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꽃이 평범한 것임에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 여우가 나타나 말했다.

정원에 장미가 아무리 많아도 너를 필요로 하고, 네게 필요한 장미는

우주에 단 하나 ‘별에 두고 온 그 꽃’뿐이라고.

시간을 함께하며 서로를 길들인 관계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사람들은 그 진리를 잊어버렸지만 너는 잊어선 안 된다고.

5월 부부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섭섭하고 원망했던 마음도 없잖나 있지만, 이제는 측은지심이 자리하고 있어 하루하루가 새롭게 다가온다.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 알게 된다는 진리를 되새긴다. 연리지의 아문 상처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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