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자 수필가

 
 

바람결이 선선하다. 아침 일찍 서둘러 출근했다. 앞산이 산 중턱까지 햇살을 받아 안고 나를 반긴다. 볕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나무들은 부지런한 농부처럼 산소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려는 듯하다. 그러나 능선 아래는 이불속처럼 고요하다. 새가 날고 매미의 이른 합창에 하나둘 숲이 깨어나고 있다.

사무실에서 일을 마치고, 나는 등산화 끈을 조여 맸다. 어수선한 마음을 달랠 겸 산을 올랐다. 여름내 줄기차게 내리던 54일간의 비, 3번의 태풍이 흩고 지나갔다. 그 자리에 모든 것이 녹아 없어질 법도 한데 넝쿨을 뻗어 올린 개머루와 청미래 열매가 익어가고 있다. 살아있는 모든 식물은 씨앗을 키우느라 바쁘다. 그들은 볕을 향해 키 높이를 하고 태풍이 몰아칠 때는 다소곳이 엎드려 지나가길 기다렸다. 조용히 자기만의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며 가을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내 가을을 생각해 본다. 초라하기 그지없다.

몇 년 전 남편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밖에서 머물 핑계만 찾는 듯 보였다. 주말도 없이 직장에 매달렸다. 그러던 그가 정년을 맞아 퇴직을 했다. 밖의 일에 익숙했던 그 사람은 집에서 할 일이 없자 불안한 듯 보였다. 머리를 식히고 마음의 정리가 필요하다고 방황했다. 어느 날 배낭에 짐을 꾸려 속리산 자락 어느 작은 암자로 떠났다. 텅 빈 집을 지키던 나는 혼자 남겨진 긴 시간이 왠지 두려웠다. 한참 후에 돌아온 그는 딴사람이 되었다. 다음 날부터 어머니 산소 옆 뙈기밭을 일구고 블루베리 묘목을 심고 가꾸기 시작했다. 농부가 된 그는 가뭄과 폭우에 밤잠을 설칠 때가 많았다.

3년이 지나자 나무는 보답이라도 하듯 탐스러운 보랏빛 열매로 수확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몸에서 보내는 이상 신호에 남편은 병원을 찾았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검사 결과는 우리를 망연자실하게 했다.

다음 방문 예약을 하고 퇴원을 했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던 우리는 강원도 오대산을 찾았다. 청량감마저 드는 초겨울 날씨에 코끝이 시렸다. 간간이 부는 골바람이 볼을 때렸다. 눈이 시리도록 하늘은 맑은데 가슴은 잿빛으로 물들어 갔다. 바라보는 곳곳의 아름다운 절경이 저리 서러울 수가 없었다. 하늘은 깊은 물속에 잠겨 푸른빛을 더하고 우리 내외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묵묵히 걷기만 했다.

병원에서는 필요한 항암과 방사선을 권한다. 며칠 후 가족회의가 열렸다. 자식들은 현대의학을 믿고 따르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 우겼고, 남편은 스스로 설정한 자연 치유의 길을 가겠다고 고집했다. 나는 이도 저도 불안해서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찾아온 불청객은 어찌나 까다로운지 조금만 소홀히 대하면 발끈하며 본성을 드러낸다. 남편은 그의 심중을 헤아려 어루만지고, 나는 좋다는 음식으로 그를 달랜다. 우리는 그 손과 삼 년째 동거 중이다.

어제는 병원을 다녀왔다. 봄부터 여름내 새로운 면역 치료제로 애를 썼지만, 남편의 검진 결과는 기대만큼 좋지 못했다. 애써 서로의 표정을 외면했다. 그러나 실망하기엔 아직 이르다. 이보다 더 나쁜 상황에서도 우리는 일어섰다. 이 가을처럼 우리의 수확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압박감을 이겨낼 담력도 필요하다. 힘이 들 땐 바람의 온기를 담아 서로를 다독이며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돌아오는 주말에는 남편과 피톤치드 가득한 편백나무 숲에서 머물 예정이다.

줄기차게 내리던 폭우와 뿌리째 흔들린 태풍에 맞서, 의연하고 꿋꿋하게 이겨낸 식물을 바라보며 나는 단단히 조인 발끝에 힘을 준다.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음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