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순 <음성문인협회원>

새벽녘 친정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어제 약장사 구경을 갔었는데 말여, 너한테 딱 맞는 약이더라. 잔소리하지 말고 먹어만 줘라, 알았냐? 조금 있다 갈께.” 딸에게 애원하다시피 하시는 엄마의 청에 차마 나는 뭐라 할 수 없어 “잘 먹을께요”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도로는 온통 눈이 얼음으로 변해버렸다던데.....
발을 조금이라도 헏디디기라도 하면 큰 낭패라도 당할 것 같은 아침, 내심 친정 엄마의 아침 방문이 걱정되었다. 이윽고 현관문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양손에 커다랗고 까만 봉다리 두 개를 들고 들어오시는 모습이 얼마나 당당하시던지 분명 비싸게 사셨을 터인데 딸의 잘먹겠다는 한마디가 저리도 좋으셨을까. 그 동안 내가 얼마나 불효를 했던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딴엔 친정 부모에게 시집와서까지 폐를 끼치기 싫어 무조건 싫다했다. 그뿐인가 돈 있으시면 우리 사줄 생각 마시고 당신들 사고 싶은 것 있으시면 사시라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이 가슴에 서운함으로 박히셨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늙으신 부모에게는 자식에게 쓰는 것이 그 무엇 보다 소중했으리라.

미끄러운 도로변도 엄마에게는 문제가 안되었던가 보다. 봉다리를 풀으시며 “아침 저녁 하루 두 번 먹어라 그리고 먹고 나면 피를 쪼끔 쏟는다더라 하지만 몇 일 있으면 괜찮다니까 걱정하지 말고, 먹어본 사람이 많이들 사길래 나도 얼른 샀다. 그리고.....” 신이 나서 장황하게 늘어놓으시는 표정은 마치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신약이라도 구해 오신 모습이다. 못 믿어웠던지 엄마는 내게 몇번을 신신 당부를 하시고는 또 약 장사 구경을 가셨다. 예전에는 수도 없이 약장사 구경가지 마시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한마디도 못하고 말았다.

여름 내 작열 하는 태양아래서 팔순이 다되신 노부모는 고추농사, 콩 농사, 깨 농사 등을 지으셨다. 자식에게 기대기 싫다며 피땀으로 벌으신 돈이다. 그런데 요즘 선량한 촌로들의 주머니를 노리고 읍내에는 우후죽순처럼 약장사들이 들어서고 있다. 내 노모도 약장사들의 계획된 사탕발림에 야금야금 돈을 쏟아주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세상의 부모들에게는 아무리 비싼 약일지라도 자식들을 지켜줄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에 아까울 게 없으셨을 것이다.

물끄러미 약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믿고 사다주신 약이라는 생각에 ‘그래 먹지 뭐 이게 효도인데’ 하고는 한 알을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냄새가 역겨워서 차마 입에 넣어지질 않았다. 약을 도로 곽 안에 넣었다.

엄마에게는 미안할 일이지만 한편으론 나 또한 약장사의 꾐에 넘어가는 것 같아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세상에는 양심을 버리고 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 지금 농촌은 늙으신 부모님들이 대부분이다. 젊은 사람들은 깨끗하고 쉬운 일을 찾아 도시로 나가고 촌로들만이 봄, 여름, 가을동안을 지키고 가꾼다. 그리고 겨울에는 쓸쓸한 허수아비의 모습처럼 겉만 무서운 힘없는 노병이 되어 서 있다.

그런 틈새를 파고드는 것이 약장사들이다. 추수한 들판에 기회만 엿보다 모여든 참새 같은 존재들이다. 언제나 행사장에는 젊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할머니들만이 그들이 끌고 가는 대로 정신없이 마취되어 깊이깊이 빠져 들어간다.

그분들에게는 위안이 필요하다. 그런 약점을 참새들은 너무도 잘 안다.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약속하고, 거기에다 아픈 곳도 고쳐주고, 가려운 곳까지 긁어줄 것처럼 아양을 떠니 가슴 한켠이 휑한 노인들에게는 그 보다 더 좋은 묘약은 없을 터이다. 정말 노인들에게는 그들이 불러주는 노래가 마음을 앗아가는 사랑의 묘약인 듯 하다. 내 노모 또한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분이다. 하지만 무어라 할까.

그것이 황량한 계절의 유일한 낙일 터인데 그것을 어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냥 소리 없이 보아주는 것이 작은 효도인 것을........ 오늘도 날아드는 참새떼를 보며 소리를 질러본다. 하지만 내 빈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나를 보며 웃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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