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수필가

 
 

건너편 낮은 돌담 집의 남자는 한참을 전화를 붙잡고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다. 한 손에는 타다 만 담배를 들고 전화를 하고 있는 그는 가끔씩 속이 타는지 담배를 몇 모금씩 급하게 빨고는 다시 또 전화에다 대고 무어라 말을 한다. 아무래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가 보다. 담은 있지만, 그저 경계의 용도일 뿐 누구라도 언제든 그 집 마당을 들여다보는 게 어렵지 않다. 이런 집이 지천인 이곳은 제주도다. 여행을 온 지 오늘로 삼일 째다.

오늘은 아침 겸 점심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고샅을 둘러보려 길을 나섰다. 배낭에 오이 두어 개를 반으로 잘라 넣고 운동화 끈도 단단히 맸다. 울퉁불퉁 모양도 제각각이고 구멍도 숭숭 뚫린 담들이 보면 볼수록 신기해 만져 보기도 하고 기대어 서 보기도 했다. 이곳저곳을 살피며 걷다 보니 동네 한 바퀴 도는 것도 몇 시간이 걸렸다. 돌담 너머로 보이는 마당에는 어른 주먹 두어 개는 흡족히 되고도 남을 귤들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가 있는 집 앞에 발길이 멈췄다. 가만 보니 이런 커다란 귤이 달린 나무가 있는 집은 이 집 말고도 꽤 많았다. 아니 그런 나무가 없는 집을 찾기가 더 쉬웠다. 그날 저녁 그 과일에 정체가 여름에 먹는 귤이라 하여 ‘하귤’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펜션 주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내가 사는 지역은 비바람으로 인해 기온이 차다는데 이곳 제주의 날씨는 쾌청하다 못해 덥기까지 하다. 크지도 않은 나라에서 이렇게도 날씨 차가 나다니 마치 이국땅에 있는 기분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 여유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쉬려고 온 여행이니 그날그날 기분이나 몸 상태에 따라 행동하기로 했다. 물론 렌트카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렌트카는 될 수 있으면 끌고 나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온 국민이 해외로 나가지 못하니 이곳 제주로 여행객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떠나온 날 청주 공항에도 제주도로 떠나는 사람과 청주로 돌아오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런데 제주도로 온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간 걸까. 이곳은 제주 공항과 반대편에 있는 서귀포의 작고 조용한 마을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6일 동안만 머물지만, 다음에는 한 달 살이를 목표로 오고 싶다. 한적하고 인적도 드문 이곳에 점점 빠져들고 있는 중이다.

얼마 만에 찾은 여유인지 모르겠다. 하루하루가 바쁘기만 했는데 이곳에서 지내는 모든 순간들은 느리기만 하다. 어쩌면 그렇게 빠른 시간들은 모두 자신이 만드는 것일 게다. 가끔은 멈춰 서서 내가 지나온 길들을 돌아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지 못해 놓친 것은 없는지, 내 욕심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게 했던 일은 몇 번이나 있었는지, 바쁘다는 이유로 할 일을 뒤로 미룬 것은 또 무엇인지 등을 조용히 혼자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말이다.

이런 시간을 만드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나는 이런 시간을 앞으로도 또 만들고 싶다. 어떤 이는 팔자가 좋아 그런 생각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 그런 시간들이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어 준다면 그 또한 꼭 필요한 용기는 아닐까 싶다. 자신을 위한 시간은 혼자여도 좋고 둘이여도 좋다.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잠시라도 멈추게 만드는 시간, 그것은 진정 우리가 만들어야만 하는 시간이다.

건너편의 낮은 돌담 집 남자, 일이 잘 해결이 된 것인지, 아니면 답답한 속을 풀려는 것인지 머리가 마당을 향해 있던 트럭 운전석에 냅다 올라타고 있다. 그 남자가 떠난 그 마당에는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돌담을 뚫고 들어와 나무들을 흔들며 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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