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수필가

 
 

김창흡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학자이기도 하다. 사실 김창흡의 인품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고전 수필, <낙치설>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김창흡은 예순여섯이 되던 해에 앞니 하나가 빠져 변해 버린 자신의 얼굴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한편으로 음식을 먹거나 책을 읽을 때 많은 불편을 겪는다. 그로인해 그동안 나이에 맞지 않게 생활해 왔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고, 노인으로서 분수를 지키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또한 네 가지의 불편함, 조용히 들어앉아 있어야 하고, 침묵을 지켜야 하며, 부드러운 음식을 먹어야 하며, 글도 마음속으로 읽어야 함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우리는 몸이 늙으면 마음도 덩달아 약해진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김창흡은 나이가 듦에 따라 육신이 고단해 지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인다. 어떻게 늙어가는 것이 올바른 길인지를 알려주는 듯해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오늘 우연히 꺼내 본 책에서 김창흡의 <예원십취藝園十趣>를 읽게 되었다. ‘나의 열 가지 즐거움’이라고 해석이 된 글이었다. 시상이 떠오르는 일, 친구를 만나는 일, 좋은 책을 만나는 일을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유려한 문장력으로 열 가지로 열거했다. 책을 덮고 보니 나도 따라 해보고 싶어 졌다. 나의 ‘열 가지 즐거움’은 무엇일까?

너무 더운 날, 길을 가다 문득 작은 들꽃 하나가 나를 보고 노랗게 웃고 있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 진 일. 늦은 밤 남편과 음성천변을 거닐다 길가에 핀 꽃을 보고는 사진을 찍어 주겠다며 꽃 속에 서 보라는 남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던 일. 비 오는 날 발코니의 파란 파라솔이 쳐진 탁자에서 소설책을 읽다가 바람이 부는 바람에 비를 맞고 뛰어 들어 왔던 일. 아침이면 발코니에서 길냥이 들이 밥을 달라며 제 나름대로의 장소에 숨어 나를 지켜 볼 때 어디 숨어 있나 찾아보는 일. 생각지도 않게 딸과 아들이 집으로 오는 날이면 갑자기 바빠지는 엄마를 보고는 ‘엄마 힘들까봐 연락도 하지 않고 왔는데’하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을 다 컸다는 생각에 흐뭇했던 일. 여름이면 어찌 알고 찾아오는지 개구리 두 마리가 연못 속에서 머리만 내밀고 있는 모습을 마주하는 일. TV를 보다 갑자기 글감이 생겨 메모를 해 놓았다가 며칠을 생각하고 생각하다 일필휘지로 작품하나를 완성했던 일. 인터넷을 검색하다 읽고 싶어 주문한 책이 도착하면 연인을 만난 듯 설레는 맘으로 뜯어보던 일. 가을밤, 살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솔솔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풀 섶에서 하모니를 이루며 짝을 찾는 풀벌레의 소리를 감상하는 일. 갑자기 외롭다는 생각에 울적해 질 쯤 어떻게 마음이 동했는지 술 한 잔하자는 지인의 전화를 받는 일.

이렇게도 즐거움이 많았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나열된 나의 ‘열 가지 즐거움’은 대단하지도 어렵지도 않은 소소한 일들이다. 열 가지의 즐거움을 생각하다 보니 내 사는 모습이 참 정겹게 느껴진다. 물론 구비마다 힘든 일도 많았고 아웅다웅 부딪히는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소소한 즐거움이 나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앞으로 비바람이 부는 날도 눈보라가 치는 날도 많이 남아 있음을 안다. 그래도 그 행간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 줄 소소한 즐거움을 생각하면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더 크다.

지금도 바깥엔 비가 후두둑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 비가 그치면 하늘이 감춰 두었던 토실한 구름과 붉은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리라. 그리고 구름사이로 작은 새 한 마리가 서쪽을 향해 포동동거리며 날아가는 모습도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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