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읍성 호야나무」

조선초기 서해안 방어군사의 중심지였던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읍에는 둘레2000m의 조선시대 석성이 남아있다.
고즈녁한 시골 마을에 있는 평지성(平地城)으로 원형이 가장 잘 보존 되어 있어서 성내의 학교와 가옥을 철거하고 성벽을 보수하였다.
1579년 이순신 장군도 한때 그 성에서 근무한적이 있다. 넓은 성안에는 나무 몇그루와 관아건물 한두채만 있어 유적지의 적막함이 짙게 배어 있다.
성내 옛옥사 터 옆에 서있는 호야나무(느티나무를 그곳에서는 호야나무라 부른다.)는 줄기마다 수많은 상처를 입은채 서있다.
수령 3백년을 헤아리는 이 나무는 조선시대 천주교 탄압시(1790∼1880) 신자들을 매달아 고문하면서 배교(輩敎)를 강요했던 나무로 김대건신부의 조부인 김진후(비오) 신도도 이곳에서 고문을 받던 중 순교했다고 한다.
그당시 이 나무에 고문도구를 걸쳤거나 철사로 손을 잡아멘 까닭에 나무에는 많은 옹이가 있으며 나무속에 깊숙히 박힌 철사를 볼 수 있다.
성밖에는 넓다란 바위가 있는데 그곳이 신도들을 참살한 곳이라고 한다. 고문하는 소리가 너무 고통스러워 서로 먼저 죽여 달라고 했더니 얼마나 비극적인 장소였는지 알 수있다.
지금은 조용한 정적만이 가득찬 곳이지만 한국 천주교의 성지로서 해미 천주교회선열현양 협의회는 천주교 신자들의 탄압을 지켜본 이 나무를 순교목으로 지정 1975년부터 보호하고 있다.
해미읍성 손요안나 수녀는 “목숨을 잃으면서 까지 천주교를 택한 당시의 순교자들을 증언해줄 사람은 없지만 이 나무에 박혀있는 철사등은 당시를 무언으로 증명해준다.”면서 이 순교목을 보려는 신도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높이 13m에 아래까지는 잘린 볼품없는 나무지만 그 역사성의 무게는 다른 어떤 나무와도 비교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다.
석성안으로는 흙을 쌓아올려 방어하기 좋게 조성되었다. 가냘픈듯 서있는 성루를 해질무렵 바라보노라면 슬픔과 짙은 감동이 몰려온다.
느티나무는 고향의 정자목으로 많은 오래사는 나무이다. 우리나라에는 천년이상된 나무가 예순네그루가 있는데 그중 스물 다섯그루가 느티나무이다.
느티나무 목재는 우리나라 제일로 친다. 색이 아름답고 무거워 귀하게 대접 받았다.
신라의 천마총이나 가야분에서 나오는 관도 느티나무였으며 유명한 고궁이나 사찰의 기둥 역시 느티나무로 만들었다.
요사이에는 고급 악기재료로 쓰인다. 느티나무의 관상적 가치는 현재 전국의 공원이나 학교등 공공건물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먼지를 타지 않고 항상 깨끗하며 벌레가 들지 않아서 귀해 보인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때의 인상이 너무 강해 내 기억의 창고에 선 그 나무는 아직도 바래지 않고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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