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설희 수필가

 
 

나는 책에 관해서는 소장파다. 사고 본다. 좋아하는 작가니까, 추천받아서, 고전이니까 한 번쯤 읽어야 하지 않을까? 저렴하게 나와서, 사은품이 너무 예뻐서, 절판본이라 등등 사야 할 이유는 넘치고 넘친다. 문제는 다음이다. 사고 나면 언제든지 읽을 수 있다는 마음에 우선 꽂아둔다. 그리고 잊어버린다. 그렇게 산 책들이 책장을 채우고 방바닥까지 쌓였다. 나는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아닌 이상은 대부분 중고책으로 산다. 중고책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저렴해서, 특히 2만원 이상 무료 배송 문구를 보면 2만원을 채워야 이득이라는 착각에 이것저것 생각도 않고 장바구니에 담는다. 그래서 종종 같은 책이 2권 있는 일도 있다. 물론 읽지 않았다. 순간 자괴감에 빠진다.

가끔 책장을 바라보면 밀린 숙제 같다. 어떤 책장 한 칸엔 내가 읽는 책이 한 권도 없는 일도 있다. 다짐한다. 집에 있는 책들을 다 읽을 때까지 절대로 책을 사지 않으리라. 하지만 중고 알람 등록했던 절판본 알람이 온다든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알람이 뜨면 나의 결심은 쉽게 무너진다.

얼마 전 <거미연인의 키스>를 완독했다. 굉장히 오래전에 산 책으로 몇 달 전까지 나는 이 책이 내 책장에 있었는지도 몰랐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작가 지망생이라면 한 번쯤 읽어야 할 책이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샀던 것 같다. 사고 나서 몇 번은 시도한 거 같지만 결국 잊었다. 그래서 독서 모임에서 이 책이 선정되었을 때 반가웠다. 오래된 숙제를 해결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나 처음은 읽어나가기 힘들었지만 중후반부터는 쉽게 넘어갔다. 그리고 다 읽고 나서는 평범한 진리의 전율을 느꼈다.

행복의 파랑새는 집에 있었다!

거미여인의 키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교도소 안에서 정치범 발렌틴과 미성년 성추행범으로 붙잡혀온 트랜스젠더 몰리나의 대화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어떠한 이유로 몰리나는 발렌틴에서 자신이 본 영화를 셰에라자드처럼 들려준다. 그때마다 발렌틴의 반응도 재미있는데 몰리나가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을 설명하면 발렌틴은 마르크스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읽는 내내 둘의 티키타카도 흥미롭지만 기존 소설의 틀이 아닌 색다른 구성이 신선했다. 상호테스트라는 관점도 독특했고 몰리나의 사유방식 서술도 인상 깊다. 좋은 소설을 읽으면 몸에 맞는 보약처럼 마음에 딱 스며든다.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기분도 들었다. 이런 책이 내 책장에 몇 년 동안 묵혀있었다니, 너무 아까운 짓을 했다.

오랜만에 읽은 <데미안>도 그랬다. 처음에는‘아브락사스’라는 단어에 꽂혀 그냥 읽었다. 오히려 아브락사스가 나오는 구절을 읽고 책에 흥미를 잃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나에게 아브락사스는 그저 하나의 비유에 불과하다. 마치 <백년 동안의 고독>의 돼지 꼬리처럼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도착의 론도>도 오랜만에 다시 읽어도 역시 재밌었다. 이 소설은 추리소설로 구매한 지 오래됐다. 지인과 주고받은 책을 찾다 눈에 들어왔다. 별생각 없이 꺼내 읽었는데 결국 자리 깔고 누워 다 읽었다. 주인공이 작가 지망생이라 더 공감이 갔다.

냉장고 파먹기가 생각났다. 소비도 줄이고 쓰레기도 줄이자는 취지로 한때 예능이나 정보프로그램에도 자주 나왔다. 나에게도 책장 파먹기가 필요하다. 아무리 훌륭한 이야기라도 내 안에 스미지 않으면 폐지에 불과하다. 이 많은 이야기를 어떻게 요리하며 맛있게 읽어야 할지 생각하니 설랬다.

하지만 이 결심 후, 내가 산 책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작가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 1, 2>(도서관에서 1권을 빌리고 너무 재미있어서), 이슬아·남궁인 공저인 서간 에세이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사은품 별책부록이 초판 한정이라), 박수연 작가의 <통영>(눈여겨보는 작가)이연실 작가의 <에세이를 만드는 법>(느슨했던 마음을 다잡고자) 그리고 불교 경전인 <유미힐 소설경>(무료 배송을 위해 구매)이다.

다시 한번, 책장을 파먹어보자 다짐한다. 행복의 파랑새는 분명 집에 있다.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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