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수필가

 
 

밤이면 제법 선득한 바람이 분다. 예전 같으면 바다에서 며칠을 보내고 와서야 가을을 맞았을 테지만 올해는 집에서 그냥저냥 지내다 보니 벌써 계절이 바뀌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가 멀게 안전 안내 문자가 울리고 있으니… 잦아들지 않는 코로나 확진자 수에 차마 떠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도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그건 아마도 매사 조심성이 과한 남편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남해로 여행 간 아들이 택배로 선물을 보내왔다. 코로나로 멈춰진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피 끓는 청춘들의 발걸음을 막을 수가 없어 그저 조심하라며 당부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에게는 부모의 잔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그래도 그것마저도 하지 않으면 안 될 듯싶었다.

계절이 바뀌어서 그런지 밤이면 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참 정겹다. 집을 둘러싼 지천이 온통 남새밭이니 누리는 호사다. 그런데 열어 놓은 창문으로 보이는 달이 오늘따라 슬퍼 보였다. 그건 아마도 조금 전 읽다 만 책 때문인가 보다.

‘그것은 가을날 밤이었다. 나는 철장 바깥으로 고요히 흘러들어오는 달빛에 홀리어 똥통 위로 머리를 올리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저 달을 베어 내 마음 만들고자>하는, 시조의 생각도 난다. 나는 참을 길이 없어 달을 두고 시 한 수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날 밤늦게까지 달빛을 보면서 지냈다.’

한용운 님의 수필집 ‘월명야에 일 수 시’라는 글에 나오는 한 부분이다. 한용운 님이 1919년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를 때를 회상하셨던 글이다. 선생은 그때 ‘정서조차도 조각조각 바숴져 버리는 때가 어떻게 많았는지 모른다며 철창 밑에서 바라보던 그달이 영원히 잊지 못한다.’라고 소회를 하셨다. 물론 달은 언제나 같은 모습을 떠올랐을 테다. 하지만 그달을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 상태, 공간, 순간의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일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세미나에서 문학상을 타고 축하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날 밤에도 달은 휘영청 밝았다. 동인들의 축하를 받으며 오랜만에 거하게 마신 술로 인해 취한 나는 술도 깰 겸 밖으로 나왔다. 건물 계단참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그리도 달빛이 아름답던지, 달은 희뿌연 달무리까지 대동하고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견하다는 듯 내 얼굴을 쓰다듬고 어깨를 토닥여 주는 듯했다. 한참을 그렇게 온몸으로 달빛을 받으며 행복했던 기억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독립투사들이 갇혀 있던 그 철장 문을 처연히 비추던 달과 행복에 취해 있던 나를 감싸던 그달은 분명 같은 모습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 순간 다르게 느껴지는 데는 마음 때문이다. 결국, 우리 몸을 지배하는 것은 마음이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마음이 아니라 겉모습에만 애면글면한다. 달이 아름다워 보였다가 어느 날에는 처연해 보이는 날이 허다하다.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단단히 매어두고 달이 거울이라 생각하며 살아야겠다.

벌써부터 달이 보고 싶어진다. 거울을 꺼내듯 창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달빛이 이리도 고울 수가, 눈을 감으니 부드러운 달빛이 얼굴 위로 슬그머니 내려앉는다. 이내 달빛에 취해 부지불식중에 비몽사몽이 되었다. 아뿔싸, 눈을 크게 떠야 할 것을 맥없이 눈을 감아버리니 달이 어찌 거울이 될 것인가. 오늘 밤도 여지없이 공염불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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