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수필가

 
 

며칠 새 푸르던 잎들이 널브러졌다. 마냥 싱싱한 줄 알았을까. 떠날 채비도 없이 맞이한 이별은 처절하기만 하다. 하루아침 앞마당의 목련 나무와 라일락 나무, 다래나무의 잎들을 비롯해 뒤꼍의 호박 덩굴들과 고춧잎들이 검게 변해버렸다. 별안간 들이닥친 추위는 식물뿐 아니라 사람들도 맥을 못 추게 만들었다. 가을옷을 입어야 할지, 겨울옷을 입어야 할지, 거리에는 아직 추위를 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잰걸음으로 종종댄다.

우리 집 정원에는 야생화가 많다. 둥글레, 참나리, 맥문동, 비비추, 할미꽃, 산철쭉, 진달래, 복수초, 으아리, 산 제비꽃, 산파, 그 외에도 이름을 모르는 꽃도 몇 종류가 더 있다. 대개는 야생화를 파는 집에서 산 경우가 많지만 몇 종류는 몇 년 전쯤, 봄에 나물을 뜯으러 갔다가 산에서 캐온 녀석들도 있다. 그중 하나가 ‘산파’였다. 산파의 연한 잎은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 넣어 먹으면 향긋하다는 지인의 조언에 채취한 것이다. 잎뿐 아니라 뿌리도 향긋해 뿌리째 캐왔는데 먹기에 아까워 정원에 몇 포기 심어 놨었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리가 내린 얼마 전이었다. 두 번의 된서리에 정원의 나뭇잎들은 검게 변하거나 또는 제 색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예년 같으면 정원 가운데를 지키고 있는 소국들이 활짝 피어 즐거움을 주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웬일인지 올해는 국화도 거무죽죽하니 꽃송이도 피워 올리지를 못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있었을까. 화단 경계석 앞으로 삐져나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보라색 꽃 뭉치가 보였다. 처음에는 부추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부추꽃은 하얀색이지 않던가.

그날은 내 서재인 운정재 들마루에 앉아 따끈한 커피를 마시며 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던 참이었다. 파란 하늘엔 구름이 떠가고 정원의 나무들은 낙엽들을 하나둘 떼어내고 있어 쓸쓸한 계절이라며 혼잣말을 하고 있던 때였다. 심은 지 10년쯤 된 관송나무아래 부추를 닮은 녀석이 보랏빛 둥근 꽃을 달고 바람을 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부추가 아닌 산파였다. 분명 화단 안쪽 그러니까 목련 나무 뒤쪽으로 심어 놨던 녀석이었다. 목련 나무 뒤쪽을 살펴보았다. 과연 그곳에도 가는 줄기 끝에 보라색 둥근 꽃을 달고 있는 산파들이 힘없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의 산파들은 땅에 영양분이 없었는지 힘이 없는 반면 관송 앞에서 그것도 흙도 많지 않은 강자갈 틈에서 튼실했다.

바람을 타고 씨앗이 날아왔으리라. 군락지를 벗어나 혼자 떨어졌으니 몇 배는 더 강해져야 했을까. 그렇게 몇 년을 그곳에서 조용히 힘을 키웠을 테다. 그리고 드디어 저렇게 아름답고 고고한 꽃을 피워 올렸다. 눈이 내린 듯 하얀 서리가 세상을 얼려도 산파는 보랏빛 꽃으로 강인함을 손수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보아도 대견하기만 하다. 꽃은 따뜻함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란 듯 말이다.

하기야 뜨거운 태양의 호된 담금질에 과일은 단맛을 내지 않던가. 된서리가 모든 나무들들 얼리고 이별을 강요한다 해도 분명 산파가 그렇듯이 어느 곳에선 꽃이 되어 피어나는 생명들이 있음을 알았다. 뜨거움도 차가움도 결국은 생명을 잉태하고 피워내는 모든 삶의 영속이리니 감히 속단을 내리지 않겠다. 다만, 모든 것을 덜고 비워내는 계절의 흐름 앞에 며칠 짜리 묵언 수행을 흉내 내서라도 이제는 욕심과 읍울에서 벗어나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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