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경 순

“다른 능력이 있는 사람”
이능인이란 단어를 풀이해보면 대충 이런 뜻으로 해석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능인이란 단어 속에는 보통사람은 알 수 없는 속내가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이 단어는 사실 신조어新造語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어사전에 있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이 말은 한 장애인 대학생이 자신을 어떻게 불러주어야 하느냐는 친구들의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어쩌면 그 대학생은 자신의 장애를 다양한 특징 중에 하나로 다른 어떤 능력이 있는 한 사람으로 인정해주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정상인 비정상인, 우리는 몸이 불편한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을 이렇게 부른다. 그것 또한 우리의 잣대로 명명해놓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겠다. 이 지구에는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간다. 장애인 또한 여러 부류중에 한사람으로서 존중해 주고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이능인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힘든 현실과 직면해 있다.
몇 년 전 우리 가족과 인연을 맺게된 장애인이 있었다. 뇌성마비였던 그를 보고 7살 박이 막내아들은 오징어 삼촌이라고 불렀다. 자신의 모습을 본 따 부르는 것임을 알면서도 싫은 내색 하나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가게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아 월급을 많이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몇 달 후 그가 우리 가게를 놀러왔다. 안색이 좋지 않아 궁금해서 물어보는 우리에게 그는 다니던 직장에서 몇 달째 월급을 받지 못했다며 울상을 지었다. 장애자들만 고용했던 그곳에서의 일은 볼펜을 조립하는 것이었다. 며칠을 잔업을 해도 그렇게 즐거웠다는 것이다. 어쩌면 단지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또한 자신이 떳떳한 사회인의 한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을 것이다.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 중에는 팔다리가 뒤틀려 입으로 볼펜을 끼우는 중증장애인도 있었다. 수 없는 자신과의 사투를 벌였을 것이다. 정작 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힘든 것은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하는데 있는 것은 아닐까. 장애인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사람이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누군가 나서서 업주를 찾아 나설 사람도 없었다. 장애인들의 약점을 노린 사기였다.

언제나 한발 뒤에서 생각하는 그들이다. 또한 낮은 곳에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사람의 능력을 우리는 가끔 우리가 지닌 잣대로 재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는 사는 동안 수많은 선택 앞에서 서야 하는 경우가 있다. 만약 혹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어떤 한 여인이 임신중이다. 그 여인은 현재 8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 중 셋은 귀머거리이고 둘은 장님이며 한 명은 정신지체아이다. 또한 그녀는 매독에 걸려 있다. 그녀는 낙태를 해야 할까?”

만약 당신이 낙태를 해야 한다는 쪽에 손을 들었다면 당신은 ‘베토벤’을 죽인 것이다. 나 또한 서슴없이 낙태를 해야한다고 했다. 이처럼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잘못된 편견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지 모른다

헬렌 켈러는 ‘장애는 불편하지만 불행하지 않다’고 했다. 이 교훈은 어쩌면 장애인들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깨달아야 하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장애인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못한 사람은 세상에는 수 없이 많으니까 말이다.

그들에게 희망을 가슴속에 품을 수 있도록 마음의 눈을 키워야겠다. 더 이상 그들이 높은 사회의 벽 앞에서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믿고 있다. 이 세상의 벽이 아무리 높고 험난해도, 이능인들의 도전에 대한 의지는 결코 무릎을 꿇지 않으리라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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