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수필가

 
 

조용한 카페에 앉아 책을 읽는 중이다. 고개를 들어 밖을 보았다. 카페의 벽은 온통 유리로 되어 있어 바깥 풍경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다. 억새는 바람에 이리 눕고 저리 눕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넘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바람에 시달리는 것은 억새만이 아니다. 억새 사이사이 서 있는 자작나무도 온몸이 흔들리고 있다. 미처 떨어지지 못한 잎들은 바람에 속절없이 끌려간다. 그렇게 바람에 끌려온 잎들은 화단의 경계석 아래 모여 오종종 떨고 있다. 바람은 지상에만 부는 것은 아닌가 보다. 하늘의 구름도 바람의 영향인지 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미처 형태도 갖추기 전에 바람이 들이닥쳤을까. 엉성한 모양의 구름들이 가는 곳도 모른 채 하늘을 가로질러 흐른다.

밖은 저리도 바람에 아우성인데 카페 안은 평화롭기만 하다.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한몫을 했다. 밖을 보지 않는다면 바람이 저리 심하게 부는지도 모를 일이다. 방금 전 바람에 호되게 혼나고 들어온 사람들도 이 안에서는 그새 밖은 잊은 듯 평온하다. 밖과 안, 어찌 이리도 다를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자신이 당하지 않으면 남의 일이 되고 마는 ‘강 건너 불구경’이 당연한 일일까. 우연의 일치인지 지금 읽는 책의 내용이 카페 안과 밖의 풍경을 말해 준다. 시선을 어찌 두느냐가 관건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관점의 차이라 해도 되겠다.

《널 위한 문화예술》을 읽는 중이다. 그림에는 조예가 깊지 못하지만 그림이 품고 있는 이야기에는 관심이 많은 편이다. 예전에 삼성 미술관 리움에서 마주했던 정선의 <인왕제색도> 앞에서도 나는 한참을 그 앞에서 붙박이를 했다. 정선의 나이 76세에 그린 그 그림은 자신의 친구 사천 이병연을 위해 그렸다. 사천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에 정선은 친구의 쾌유를 기원하며 자신의 온 마음을 다했을 터이다. 하지만 정선의 절실한 기도에도 사천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나는 <인왕제색도> 속의 기와집이 유심히 눈에 끌렸다. 산속에 묻힌 기와집의 창이 유난히 환했기 때문이다. 혹여 정선과 사천이 불을 밝히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 느낌이 생생해 며칠 후 나는 정선과 사천의 이야기를 글로 남겨 놓았다.

오늘은 네덜란드 화가 얀 반 에이크의 작품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를 두근거리게 했다. 이 그림은 예전에 논술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수업했던 작품이다. 그때는 그림의 제목도 달랐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이었다. 이 그림은 유난히 상징성이 많은 작품이다. 그런데 논술 수업을 할 때 그림들의 상징성과 지금 《널 위한 문화예술》에서 알려주는 상징성은 극과 극이다. 많은 사람이 이 그림을 보고 결혼식이라고 평했지만 2000년대 들어 재해석이 되어 ‘죽은 아내를 기리는 초상화’라는 것이다. 결혼을 상징했던 수많은 상징들이, 관점을 달리하니 죽음을 상징하는 것들이 되고 말았다. 예를 들어 귀여운 강아지 하나에도 결혼이라고 했을 때는 충성을 상징한다. 하지만 초상화라는 측면에서는 강아지가 남자를 등지고 여자 주인공을 행해 있다는 점은 중세시대 여성의 무덤에 개를 많이 조각해 두었다는데 초점이 맞춰진다.

분명 그림은 하나이다. 하지만 사물들의 상징이 결혼과 초상화, 축복과 애도라는 정반대로 해석으로 나뉘고 있다. 그림에 대한 정확한 진위는 얀 반 에이크만이 밝힐 수 있다. 그림 하나에도 이렇게 서로 다른 추측이 이는데 하물며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세상의 일들은 얼마나 더할까. 밖의 이야기는 무성하고 창 안의 세상은 고요하다. 어떤 것이 진실일까. 혼돈의 세상,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똑바로 보고 제대로 들으며 진실을 말하는, 두 개씩의 눈과 귀, 하나의 입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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