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환 강동대 사회복지과 교수,행정박사

 
 

20세기는 과학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자연과학적 가치와 사고가 1900년대 전반을 휩쓸었다. 수학과 물리학에 기반한 학문적 성과와 방식이 자연과학은 물론 철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제학에서 케인즈경제학을 낳았던 영국의 케인즈가 수학자에서 출발한 경제학자라는 사실과 사회과학의 주류로 자리 잡고 있는 행태주의가 통계, 숫자 등 자연과학적 기법을 차용하고 있는 것은 이를 반증하는 사례이다.

어쩌면 이와 같은 자연과학적 사고체제의 광풍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20세기 인류가 이룬 그 많은 영광과 고통은 이들 자연과학적 성과의 산물이다. 인류가 이제까지 이룬 것보다 더 많은 고도의 물질문명을 단기간에 이룰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 부산물로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비롯한 현대전의 참혹한 희생을 가져왔던 현대 무기의 위력은 이들 과학적 어두운 그림자라 할 것이다.

20세기에 수학과 물리학 등 자연과학이 크게 각광을 받은 것은 그들의 사고체제와 방식이 이성과 합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과학의 학문적 특징의 하나는 검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1=2’라는 단수한 수학은 그 누구도 이를 검증할 수 있고, 거부할 수 없는 결과를 도출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과학의 방식에 의해 고도의 물질문명이 탄생하면서 사회과학에서도 바로 검증할 수 있고,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자연과학적 방식을 차용하고자 하는 행태로 나타난 것이다.

비단 자연과학적 이성과 합리의 방식은 정치에 있어서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일본과 우리 대한민국을 들 수 있다. 전후 일본의 고도 경제성장과 6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이들 두 나라는 전문 관료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일본과 한국의 경제부처 관료들은 강력한 권한을 소유하고 국가정책을 주도하였다. 특히 한국의 경우 핵심 경제부처 장관은 현재까지도 경제관료 출신이 맡고 있으며 순수한 정치인 등은 결코 넘볼 수 없는 영역으로 자리메김하고 있다. 이들 전문 관료의 지식과 판단에 대해 정치는 읍소(?)를 하였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하는 아닐지 모르겠다. 전문 관료가 가진 힘은 오랜 숙련과 전문지식에 오는 권위였고, 이는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전반의 현상은 지식에 있어서 절대 거역할 수 없는 진리 혹은 정답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며 전문가의 전문성에 대한 존중이 상식과 같이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사조의 발생과 함께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들 사상은 지식의 상대성을 역설하였다. 사회과학은 물론 자연과학에 있어서도 진리의 상대주의를 주장하였다. 오늘날 페미니즘, 문화상대주의 등 전통적인 사고체제에 대립하는 행태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학문적 경향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변화된 학문적 경향을 어쩌면 가장 반긴 분야가 정치가 아닐까? 과거 정치에 있어서 사실에 기반한 이성적 주장과 판단이 중요한 것이라면 오늘날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주의·주장이 되었다. 합리적 이성이 아닌 대중영합적 가치들이 다수결이라는 민주주의 이름을 빙자하여 정치를 통해 정책화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는 ‘성중립적 화장실(Gender Neutral Restroom)’이 새로운 건물에는 들어서고 있다고 한다. 그 화장실에는 남자, 여자, 트랜스젠더, 장애인 등이 이용한다고 한다. 과거 남·여 그리고 장애인으로 구분되어 있던 화장실이 성 소수자들에게 차별적인 이유로 새로운 개념의 화장실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다소 황당한 화장실 정책의 변화라 할 것이다. 전통적 남·여 그리고 장애인 화장실은 기능적 편리에 의해 구분된 것이라면 신개념의 화장실은 심리적 위안(?)을 고려하며 만들어진 것이다. 성소수자들의 불편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신개념 화장실은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정책일 뿐이다. 과잉친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익명의 타인을 평가하여야 한다면 그 첫 번째 기준은 외모가 된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개인의 심리상태까지 고려한 화장실 정책은 비이성이 이성을 이긴 정책의 대표적 사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성중립화장실을 예로 들고 보니 다소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도 사회적 약자 등의 명목으로 비이성적 정책들이 늘어나고 있다. 탈원전, 코로나 방역과 보상 등 합리적 이성으로 보기 힘든 정책들이 난무하고 있다. 3월 9일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비과학적 사고가 일소되고, 이성과 합리에 기반한 정치가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성과 합리는 상식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상식이 통하는 정치를 보고 싶다. 과학은 이성과 합리의 다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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