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설희 수필가

 
 

주로 누워서 생각한다. 책도 엎드려 누운 자세로 읽는다. 누워서 유튜브를 본다. 배가 불러도 눕는다. 졸리면 눕고 안 졸려도 눕는다. 직립(直立)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집에서는 와립(臥立) 인간이 된다. 옛말에 먹고 누우면 소가 된다고 하지만 내가 본 소는 나보다 부지런하다. 아마 먹고 눕는 생활을 하면 다음 생엔 나는 내가 되지 않을까.

사람이 죽으면 평생 잔다고 하지만 나는 죽으면 그게 잠인지 인식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지금 누울 수 있을 때 최대한 누워 보려고 노력 중이다. 난 정말 누워있는 생활이 좋다. 느긋한 게 좋다.

그래, 분명 내가 누워있는 이유는 높이 뛰기 위함이다. 개구리가 높이 뛰기 위해 움츠리듯 나의 누움도 그런 것이다. 그렇게 자리 합리화하며 누우며 게임을 한다. 최대한 머리를 비워야 한다. 머리를 공(空)으로 만들어 외부의 공(空)과 같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게임을 하고 유튜브를 보고 책을 읽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머리는 더 복잡하고 잘 때는 자괴감만 든다. 그래도 나는 또 눕는다. 그때가 가장 행복하다. 행복한데 왜 잠이 들 때면 죄책감에 시달릴까.

요즘 즐겨보는 프로그램은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다. 예전에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였다. 아이는 없지만, 어린아이의 문제 행동을 보며 나의 태도를 돌아보고 반성한다. 몰랐던 것을 발견하면 깜짝 놀라고 나는 왜 그때 그랬었는지를 알게 된다. 나 같은 성인들이 많다. 아이의 문제 행동을 보며 지금을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어른 버전의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라는 프로그램도 생겼다.

방송 내용에 종일 누워 생활하는 아이가 나왔다. 선생님이 물었다. 이 아이는 왜 누워있을까? 부모님은 게을러서라고 말했다. 아이는 긴장감이 높은 아이였다. 그 장면을 통해 <내적 긴장감>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그 단어를 듣자 그동안 내가 왜 누워있는 생활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내적 긴장감이 매우 높은 사람이었다.

나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굉장히 예민하다. 밖에서 활동할 때도 그렇고 모임도 그렇다. 그때는 웃고 떠들었지만, 혹시 내가 말실수를 한 게 아닐까? 그때 나는 왜 그런 쓸데없는 행동을 했을까? 자책하고 괴로워하다가 그냥 누워버린다.

나는 그것을 “충전”이라 생각했다. 내가 누워 생활하는 건 “충전” 중이다. 하지만 늘 방전 상태. 매일 누워있음에도 나는 왜 충전되지 않는 걸까? 언제나 누워있는 핸드폰처럼 전기에 꽂혀 있을 땐 쌩쌩한 거 같지만 충전기 선을 빼버리면 바로 방전이다.

그래서 나는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다. 지금은 코로나 시국이라 만남이 거의 없지만 사실 나는 코로나 시국이어도 내 삶은 그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코로나가 없을 때도 나는 집 밖을 잘 나가지 않았다. 나에게 외출은 약속에 의해서만 정해지는 것이다.

나는 내 안에 긴장감을 떠올렸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하기 싫다. 하지만 해야 한다. 그것도 잘해야 한다. 물론 잘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일에 대해서 트집 잡히기 싫다. 이런 마음들이 여기저기 통통거리며 튀어 다닌다. 마음의 크기는 우주처럼 알 수 없다. 불안할수록 마음의 깊이가 우주만큼 깊다는 걸 알게 될 뿐이다.

긴장은 마음의 온도와 외부의 온도가 다를 때 생긴다. 대부분 내 마음을 외부의 온도와 맞추려고 할 때 긴장되고 경직된다. 외부의 온도를 따라잡기가 너무 힘들다. 충전 배터리를 올리듯 내 마음을 충전시켜야 한다.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의 온도와 외부의 온도를 맞출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긴장하지 않고 편안해질 수 있을까. 아직 정답은 찾지 못했다. 그래도 이유를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전보다 마음이 가벼워진다. 누워서 이런 생각을 더듬고 더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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