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수필가

 
 

3월이다. 3월은 계절의 시작이면서, 모든 생명들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땅속에서는 꼬물꼬물 생명이 움트고, 지상에서는 나무들이 가지마다 매단 잎눈과 꽃눈을 키우기 바쁜 달이다. 어디 그뿐일까. 모든 숨 탄 것들에도 생명의 기운은 넘실거리고 있다. 그런데 난데없이 춘설이 내렸다. 겨울이 봄을 시샘한 것일까. 아니면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속도를 조절해 주는 것일까. 하기야 예전에도 3월에 눈이 내리는 일은 종종 있었으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급해진 봄꽃들에는 달가운 손님은 아닌 듯하다.

보폭의 조절, 춘설은 어쩌면 모든 자연의 걸음을 제어해주는 기능이라도 보아도 될 듯싶다. 우리 인생도 보폭의 조절은 중요하다. 너무 빨리 달리다 보면 언젠가 탈이 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너무 느적느적 걷는 것도 흐르는 세상사에 뒤처질 수가 있다.

조선 전기 때의 문신 강희맹이 쓴 <등산설>을 읽었다. 노나라 사람 중에 아들 셋을 둔 어떤 이가 있었다. 아들들은 어느 날 태산 일관봉을 오르는 내기를 했다. 둘째와 막내는 호기심도 많고 민첩했으며 몸도 온전했지만, 그에 반해 첫째는 착실하나 다리를 절었다.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모두의 생각과는 다르게 다리를 저는 첫째만이 태산 정상에 올라 울창한 숲과 태양이 지고, 다시 떠오르는 장관을 만끽했다. 둘째와 막내는 산을 오르는 중 자신의 날램과 민첩함만을 믿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해가 지는 바람에 그만 산기슭과 바위 밑에서 밤을 지새우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태산은 험하고 높다. 첫째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달리 다리가 성치 못하다는 단점을 알기에 한눈을 팔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한 발짝 한 발짝 쉬지 않고 올라갔다. 조급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게으름도 피우지 않았다. 그 결과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산을 오르는 일은 어찌 보면 우리 삶과 많이 닮았다.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가 크고 높을수록 주변의 유혹은 많은 법이다. 게다가 능력이 있고, 자만심이 큰 사람은 욕심의 크기도 클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게 되고 결국은 처음 목표와 다르게 엉뚱한 곳에서 허우적거리다 빠져나올 수가 없다. 또, 처음부터 목표만을 바라보고 성급하게 달려가다 보면 목표점에 이르기도 전에 제풀에 지쳐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모든 일은 욕심보다는 자신의 신념이 중요하다. 신념을 가슴에 새기고 나아가는 길을 체크해 간다면 목표점에도 어느 사이 다다르게 된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오르는 산행처럼 우리 인생도 적절한 속도를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 요즘 많은 사람이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은 어쩌면 제대로 된 삶의 속도를 지키지 않아서라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 나도 쉬지 않고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던 때가 있었다. 지치고 힘들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 결국 몇 년 전 탈이 나고 말았다. 더 이상 앞으로 달려 갈 힘도 없었지만 달려가기도 싫었다. 몸과 마음에 생긴 생채기로 너덜너덜했다. 내가 달라진 건 그때부터였다. 천천히 가기로 했다. 멈추지는 말고 천천히 그 누구도 아닌 나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뒷집의 산수유나무가 화사하다. 어느결에 꽃이 벙글어 노랗게 웃고 있다. 주인 없는 빈집에서 마당 한옆을 지키고 선 산수유 꽃은 올해도 혼자서 폈다. 그런 것일까 봐 인생이란 것이. 누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혼자서 피고 지는 것이라고 산수유나무가 말을 하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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