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 ‘한내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을 찾아

소이 한내장터 독립만세공원 전경.
소이 한내장터 독립만세공원 전경.

2년 넘게 세계적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은 멈출 줄 모른다. 이로 인해 각종 대중 집회와 지역 행사들이 좀체 개최되지 않는다. 매년 3월 1일이면 추진됐던 음성군 3.1절 기념행사도 마찬가지다.

올해로 103주년을 맞는 3.1절을 보내며, 본보는 아득했던 그날의 흔적들과 치열했던 정신을 더듬어보려고 한다. 이에 기자는 먼저, 소이 ‘한내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이하 ‘한내장터 만세공원’.)을 찾았다. --편집자 주--

한천 3.1만세운동 사적비.
한천 3.1만세운동 사적비.

■한내장터 만세공원엔?

소이 한내(漢川)장터는 음성군 소이면 중동리에서 열리다가 1982년에 폐시된 전통시장 터를 말한다. 현재는 시장이 섰던 자리만 남아 있고, 그 옆으로 ‘한내장터 만세공원’이 있다. 공원 안에는 '한천3·1만세사적비'가 높이 세워져 있다.

한내장터는 1919년 3·1운동 당시, 음성 지역에서 가장 치열하게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 한내장터 만세공원은 그해 4월 1일 한내장터에서 일어났던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고, 이 운동을 주도한 우국충절 열사들의 거룩한 독립정신을 선양해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조성됐다. 이를 위해 소이면민들은 출향인사, 유족들과 함께 모은 성금에 음성군.충청북도 보조금을 합해 총 1,200만 원을 들여, 1981년 3월 1일 높이 2.8m ‘기미독립만세추념비’를 건립했다. 이후 2001년 12월 25일 기존 추념비 상단에 50cm 탑신을 추가 설치하고, ‘한천 3·1만세 사적비‘라 명칭을 바꿈과 아울러, 헌화와 분향소를 마련하는 등 공원화 작업으로, 지역민과 방문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한천 3ㆍ1 만세사적비’는 기미(1919)년 4월 1일 한내장날에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항거했던 만세운동 주동자 김을경(金乙卿), 이중곤(李重坤), 권재학(權在學), 추성열(秋成烈), 이교필(李敎駜), 이용호(李龍浩) 등 우국지사의 행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한내장터 3.1만세 운동 재현 행사 모습.
한내장터 3.1만세 운동 재현 행사 모습.

■한내장터 만세운동은?

한내장터 만세운동은 김을경, 이중곤, 권재학(재신), 추성열, 이교필, 이용호 등 6인이 주도했다. 3월 19일 음성읍 경찰주재소 습격 등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들 6인은 4월 1일 소이면 한내장터에서 수많은 군중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군중은 또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 민병식에게 함께 독립만세 부를 것을 요구했다. 이후 출동한 일본경찰이 주모자를 연행하자, 분노한 시위 군중들이 동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히 항쟁했다. 그러나 충주에서 출동한 일본수비대가 무차별 발포하여 10여 명이 순국하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날 만세운동을 주도한 6명은 체포돼, 청주지청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이용호가 고문으로 태형 90대를 맞아 순국했으며, 김을경(1년6개월), 이중곤(1년), 권재학(1년), 추성열(6개월), 이교필(6개월) 등이 옥살이를 살았다.

올해 3월 1일 3.1절 기념 분향식 모습.
올해 3월 1일 3.1절 기념 분향식 모습.

■만세운동 주동자 6인은?

이제, 이들 6인 지사를 직접 만나보자. 그들은 누구이고, 무엇을 했을까?0

△ 김을경(金乙卿:1899~1965)

김을경은 소이면 중동리 967-3번지에서 살았으며, 21세에 이중곤 등과 한내장터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장날에 모인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전개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소이면사무소로 진출해 면장 민동식을 시위에 가담시켜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는 등 항쟁을 선도하다 체포됐다. 5월 22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뤘다. 1965년 향년 67세로 졸한 그는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1986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 이중곤(李重坤:1891~1974)

음성군 소이면 중동리 569-7번지에서 살던 이중곤은 25세에 김을경 등과 함께 한내장터 독립만세운동 거사를 계획, 4백여 명 시위 군중을 지휘했다. 그는 면사무소로 달려가 민동식 면장에게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는 등 활약하다가 체포됐다. 그해 10월 2일 고등법원에서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룬 그는 1983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 권재학(재신)(權在學,在信:1879~1938)

소이면 갑산리 624-1번지에서 출생한 권재학은 자가 재신(在信), 호는 중필(重弼)이다. 41세 때 그는 한내장터 만세운동 현장에서 5인 지사와 함께 시위 군중을 이끌고, 민동식 소이면장을 앞세워 장터를 누비며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또 김을경, 이중곤이 연행되자, 주재소로 달려가 이들 석방을 요청하며 만세시위를 선두 지휘했다. 이후 음성에 거주하던 후루미찌(古道)의 신고로 출동한 충주수비대가 무차별 총격을 가해 안창렬(安彰烈), 이태수(李太壽), 유치수(兪致壽) 등 12명이 순국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처참한 사태가 벌어졌다.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체포된 그는 그해 10월 2일 고등법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루었다. 향년 60세로 졸한 그는 1983년 대통령 표창 추서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 추성렬(秋成烈:1888~?)

당시 32세 잡화상이었던 추성렬은 충주군 충주면 읍내리 409-1번지에 살다가 한내장터 만세운동에 다른 지사 5명과 함께 계획, 주도, 적극 항쟁하다가 체포됐다. 그는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했다.

△ 이교필(李敎駜:1887~?)

충주군 충주면 교현리 사람인 이교필은 소이면 봉전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당시 33세에 한내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주재소를 습격해 구금자를 탈환하고자, 절규하면서 귀가하려는 사람들을 제지하는 등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는 체포돼 공주감영에서 6개월을 복역했다.

△ 이용호(李龍浩:1889~1920)

소이면 중동리 681-3번지 사람으로, 재관(在官)이라고도 불렸다. 30세에 한내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한 그는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군중을 이끌고 면사무소까지 행진해 민동식 면장 만세운동 참여를 권유했으며, 구금자 석방 요구와 주재소 파괴 등 격렬하게 저항하다 체포됐다. 그는 10월 2일 고등법원에서 태형 90대를 확정받고 혹독한 고문과 모진 태형 후유증으로 32세에 순국했다. 이후 그에게 정부는 1983년 대통령 표창 추서와 1991년 애족장을 수여했다.

3월 중순, 한내장터 만세공원에서 기자는 다음과 같은 싯구를 읊어본다.

“벽공(碧空)을 휘감는 구름 / 빈 들녘 스치는 바람 / 느릿느릿 흐르는 음성천 물결 // 여기 잠시 발길 멈추면 / 태극기 펄럭이고 / 절규하던 만세 소리 들려온다 // 기미년 4월 1일 한내장터에 / 죽을 각오로 나선 지사 6명과 민중이 / 구름떼처럼 모여 외치던 ‘대한독립 만세’ / 그 붉은 함성과 치열했던 항쟁, 끊임없이 되살아난다.” --기자의 졸시, ‘한내장터 만세공원에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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