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식 전 음성교육지원청 행정과장

 
 

한동안 몸이 아프고 괴로울 때가 있었다. 병원을 여러 곳 다니고 약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해 보아도 병명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그때는 별생각이 다 들었다. 우리 딸과 아들이 결혼할 때, 손잡고 들어 갈 수 있기만 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손녀딸 결혼하는 것은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들딸 이들은 모두 나의 아픈 손가락들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항상 조심해서 다루어야 하는 나의 가장 소중한 존재들이다.

요즘은 가끔 오는 손녀 재롱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어린이답고, 유아원에 다니는 아이는 아기 같고, 나름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귀엽다. 서투른 언어로 말을 배우는 것을 보면 더욱 귀엽고, 애정을 느끼게 된다. 아들이나 딸에 대한 사랑과는 또 다른 무한의 재미가 있다. 너희는 나의 내일이고 우리 집안의 미래다. 만약에 너희가 없었다면 내 삶의 의미도 없는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무엇이든 다 물려주고 싶은 생각이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우리가 살아왔던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불과 몇십 년 세월이 흘렀을 뿐인데 생활의 형태나 세상 살아가는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름을 느낀다. 손녀 애들까지도 제 부모들의 삶을 따라서 그런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우리 세대가 정으로 살아오면서 느꼈던 애틋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늘 복잡하게 생각하고 머릿속에서 주판알을 굴리며 사는 것 같다.

그렇다고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옳거나 맞는 것은 아니다. 잘못되고 거추장스러운 의식은 개선해야 하고 버려야 하지만, 무엇이든 그 의미만은 전해주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언젠가는 놓아 주어야 하는 것은 잘 알고 있으나 통제를 가하고 울타리에 가두려고 하는 것은 한없는 사랑에 기인한 것이요, 애지중지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탯줄을 자르는 순간 독립이라는 말이 있다.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호흡을 하고 우주의 에너지를 독립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자주적인 인격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이의 생각을 인정해주고 주체적인 존재로 대우해 주고 있다. 간섭 없이 독자적인 삶을 살아갈 권리를 주는 것이다. 나의 삶에 그들의 삶을 종속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때론 애써 외면하고 무관심한 척 헤어짐을 준비하게 해야 한다. 부모는 어려서부터 주관이 뚜렷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자식을 키워주어야 하는 것이 바르다고 본다.

‘호랑이로 낳아서 개로 키우지 않으려면 아이의 손을 놓아라.’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이 웃을 때 나는 웃고, 그들이 울면 나도 운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내리사랑은 주고만 싶은 일방적인 것이다. 산이 바다가 되고 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어리석은 내 사랑은 그곳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먼 훗날 내가 떠난 뒤에도 외롭지 않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며. 내 아버지가 떠난 뒤 너를 보며 내가 행복하게 살고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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