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설희 수필가

 
 

이제 막 동면에서 깬 곰처럼 밖을 나왔다. 파랗게 눈부신 하늘에 나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아직 내 안은 겨울인데 벌써 봄이 온 듯했다. 동생이 장에 가자 했다. 요즘 동생은 장에서 파는 튀김만두에 푹 빠졌다. 튀김만두는 어묵 파는 아저씨가 같이 파는 것으로 장날에만 사 먹을 수 있다. 지금 같은 세상에 클릭 하나면 다 살 수 있다지만 그곳 만두 튀김은 다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집 떡어묵을 좋아한다.

설성공원에 차를 세웠다. 장날 때문인지 볕 때문인지 공원에 사람이 많았다. 운동하는 사람, 산책하는 사람, 개를 데리고 나온 사람, 공놀이하는 아이들까지. 다들 마스크를 끼고 있지만, 눈빛은 반짝였다. 그건 마스크로도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일부러 수정교까지 걸어갔다. 무엇을 사러 나왔다기보다 천천히 구경하고 싶었다. 수정교부터 장 시작이다. 주걱에서 드라이버 수도꼭지까지 자잘한 살림을 파는 잡화점부터 장독대, 나무 파는 상인도 나왔다. 사지도 않으면서 괜히 천천히 훑어본다. 상인도 공짜 구경엔 인심이 후하다. 다리 끝에서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음성 장은 도로를 막고 장이 선다. 작년 대 공사를 마치고 올해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미세하게 자리가 바뀌었다. 사거리 초입에 있던 도너츠 가게가 없어졌다. 대신 그 옆으로 옮겼다.

사거리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짠 내가 났다. 냄새를 따라가니 번데기 가게다. 번데기를 사 먹은 지 오래다. 평소라면 냄새는 좋지만, 그냥 지나갔을 텐데 번데기 어지럼증에 좋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작년, 엄마는 어지럼증으로 고생을 했다. 정작 그때는 번데기를 먹지 않았다. 나는 엄마 핑계로 종이컵으로 2개를 샀다.

얼마 안 가 해산물 파는 곳이 나왔다. 장에 나오는 이유 중 하나다. 다른 것은 마트에서 살 수 있지만, 생선은 다르다. 꼬막과 주꾸미가 눈에 보였다. 주꾸미는 지금 제철이다. 며칠 전 제부가 주꾸미가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어쩌면 나였는지 모른다. 엄마가 꼬막을 사고 주꾸미 가격을 물어보았다. 가격을 들은 나는 괜히 괜찮다 추임새를 넣는다. 사실 주꾸미 시세 따위는 모른다. 엄마는 꼬막과 주꾸미를 샀다.

떡볶이와 순대 파는 가게를 지나 반찬가게도 지나갔다. 예전엔 젓갈 파는 곳은 하나밖에 없었는데 점점 젓갈이나 반찬 파는 가게가 늘어났다. 구운 김도 맛있다. 하지만 저번 장에 김과 젓갈을 샀기 때문에 사지 않았다. 신발가게를 지나 이불 파는 곳 옷가게도 지났다. 우리 집은 인터넷으로 사지 않는 게 있다. 이불, 옷, 신발. 몸에 닿는 건 조금 비싸더라도 손으로 만져보고 산다. 오래 쓸 것들이다. 함부로 살 수 없다.

오늘은 눈으로 실컷 본다. 건어물 파는 가게를 지나갔다. 한식 때 올린 포를 사야 했다. 한 마리 두 마리 고르다 엄마는 산소가 몇 개 인지 세어본다. 나는 10개 묶음 짜리 황태포를 보았다. 나는 가격을 물어보았다. 7,8 마리 사는 것보다 10마리 사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상인은 용대리 황태라고 넌지시 말했다. 나는 10마리를 사자고 했다. 눈에 저절로 빨갛게 구운 황태구이가 눈에 선했다. 실은 내가 조상님보다 황태를 더 좋아한다. 엄마는 달라고 했다. 엄마가 옆에서 값을 치르는 동안 동생은 다른 것을 보다가 마른 문어 다리 가격을 물어보았다. 상인은 맛있는 거라고 했다. 엄마는 그것도 하나 달라고 했다.

속옷 가게를 지나가는데 눈에 띄는 속옷이 있었다. 시골 장터에 파는 속옷은 일반 속옷 가게서 볼 수 없는 키치한 멋이 있다. 최근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다. 키치한 것에도 철학이 있다. (설명하라고 하면 못하지만) 나는 철학 하나를 샀다. 값은 엄마가 지불했다. 시장 끝 생선가게를 지나 떡 가게에 갔다. 동생은 어묵 파는 가게에 갔는데 이미 장사를 파했다. 동생은 실망하고 떡 가게로 왔다. 한식이라 떡을 맞춰야 했다. 나는 찹쌀떡 두 팩을 샀다.

최근 내가 빠져있는 건 찹쌀떡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찹쌀떡이 떠올랐다. 떠오르니까 먹고 싶어졌다. 그것에 이유나 동기 같은 건 없다. 그럴 때가 있다. 굳이 모든 것에 이유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만 샀다. 괜히 의기양양하다. 다시 설성공원으로 돌아갔다. 가는 동안 어느새 내 안에 봄이 성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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