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복지센터 광장&하오마을 뒷산

대소 오류리 하오마을 뒷산에 건립된 '기미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 모습.
대소 오류리 하오마을 뒷산에 건립된 '기미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 모습.

1919년 3월 1일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독립만세 운동이 전개됐다. 이는 4월 말까지 계속됐다. 구체적으로 음성군에서는 3월 18일부터 4월 11일까지 24회 정도 적어도 3천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본보는 3-4월을 보내며, 음성군 3.1만세독립운동 흔적이 있는 곳을 소개하고 있다. 이에 기자는 대소면 ‘기미3.1독립만세운동’ 흔적을 찾아갔다. --편집자 주--

대소면행정복지센터 광장 '기미3.1독립만세운동 추념비' 모습.
대소면행정복지센터 광장 '기미3.1독립만세운동 추념비' 모습.

■ 4.2 만세운동, 주민 1천여 명 참여

대소면 3.1독립만세운동은 4월 2일 오미장터에서 이성교(李聖敎), 임백규(林白圭), 임경순(任璟淳), 김달년(金達年), 김동식(金東植), 송인식(宋寅植), 박병철(朴炳喆), 박제성(朴濟成), 이철우(李喆雨), 류해길(柳海吉), 이용학(李容學), 민병철(閔丙哲), 박영록(朴永祿) 등이 주도해 군중 1,000여 명이 참여한 독립만세운동을 말한다. 군중들은 면사무소 유리창과 집기를 부수고, 주재소를 습격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같은 날 밤, 송인식, 박병철, 이용학, 민병철. 박영록, 박제성 등 주민 수십 명은 하오마을 뒷산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이날 대소면 만세운동 현장에서는 모두 24명이 진천수비대에 체포됐다. 그중 거사를 주도한 이성교, 임백규, 김달년, 송인식, 박병철, 이철우, 박영록 등이 모진 옥고를 겪었다.

대소 오류리 하오마을 뒷산 전경.
대소 오류리 하오마을 뒷산 전경.

■ ‘기미3.1독립만세 추념비’와 ‘기미독립만세기념비’

대소면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공간이 2곳이 있다.

한 곳은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 대소면행정복지센터 입구에 있다. 바로 ‘기미3ㆍ1독립만세 추념비’가 세워져 있는 대소행정복지센터 입구 광장이다. ‘기미3ㆍ1독립만세 추념비’는 대소면 3·1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1993년 3월 1일 건립한 2.4m 높이의 비석이다. 음성군은 해마다 소이 ‘한내장터만세공원’과 대소 ‘기미3·1독립만세추념비’ 앞에서 3·1절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대소면 3.1만세운동 유적지 다른 한 곳은 오류리 하오마을(아래오류골) 뒷산에 있다. 하오마을 공원으로 조성된 뒷산 정상에는 2008년 6월 20일 세운 ‘기미독립만세기념비’가 우뚝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은 4월 1일 이성교, 임백규, 임경순, 김달년, 김동식, 송인식, 박병철, 박제성, 이철우, 류해길, 이용학, 민병철, 박영록 등이 모여, 다음날 있을 대소 오미장터 독립만세운동 거사를 결의하고, 2일 밤 주민들이 독립만세를 부른 곳으로 알려졌다.

대소면 3.1절 기념식 만세삼창 모습.
대소면 3.1절 기념식 만세삼창 모습.

■ 4.2 만세운동 주도한 11인 애국지사들

4월 2일 전개됐던 대소 오미장터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이성교, 임백규, 임경순, 김달년, 김동식, 송인식, 박병철, 박제성, 이용학, 민병철, 박영록 등 모두 11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한다.

△이성교(李聖敎)

삼성면 천평리 궁촌 사람인 이성교는 임백규, 유해길 등과 함께 3월 20일 삼성면내 산위에서 횃불 만세시위를 벌였고, 4월 2일 6백 여 명이 참여한 천평리 궁촌 배알미 독립만세를 부른데 이어, 이날 밤 대소면 소재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도 적극 동참했다. 이성교는 왜경 하야(河野) 어깨를 쇠스랑으로 쳐 중상을 입혀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징역 3년을 복역했다. 옥고를 마친 이성교는 왜경의 심한 압박이 계속되자,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목매어 자결하고 말았다.

△임경순(任暻淳, 林景淳)

임경순은 4월 2일 밤 대소면사무소에서 벌어진 시위에 가담해, 면사무소를 불질렀고, 진천수비대 반격으로 군중과 함께 해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백규(林白圭)

삼성면 천평리 궁촌(宮村) 사람인 임백규는 이성교와 함께 3월 20일 삼성면 만세운동과 4월 2일 삼성면 천평리 배알미 만세운동 주도에 이어, 4월 2일 밤 대소 오산리 면사무소 습격 등 만세운동도 적극 참여했다. 임백규도 체포돼 서대문 감옥에서 3년간 복역했다.

△김동식(金東植)

김동식은 4월 2일 밤 대소면사무소를 습격해 의자를 파괴하고, 군중들 앞에 서서 사기를 높이다가 체포돼 6월 형을 받았다.

△김달년(金達年)

김달년은 4월 2일 대소 오산리 만세시위에서 군중 수백 명과 함께 면사무소를 습격,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임백규와 돌을 던져 면사무소 유리창을 깨뜨리다가 체포, 6개월 형을 받았다.

△송인식(宋寅植:1884~1959)

대소면 사람인 송인식은 4월 2일 오류리 하오마을 뒷산에서 주민 십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행진을 계속해 오산리(梧山里) 면사무소를 습격, 사무소내의 기물, 서류 등을 파손하다가 체포됐다. 송인식은 5월 10일 보안법위반으로 태형 90대와 벌금 20원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그 공훈을 기리어 199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박병철(朴炳喆:1901~1946)

음성 사람인 박병철은 호가 유산(有山)이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4월 1일 오류리 뒷산에서 민병철, 박영록, 박제성 등과 함께, 4월 2일 만세운동을 결정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고 동지를 포섭했으며, 2일 밤 면사무소에서 1천여 명에게 선언서 배포와 독립선언식을 거행,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그는 두 차례 면사무소 유리창과 의자를 부수고 기구, 장부 등을 파손하며 격렬하게 투쟁했다. 일경과 육탄전을 감행해 중상을 입힌 것을 비롯해 면사무소를 불지른 그는 하오마을 뒷산에 올라 밤새도록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진천수비대가 출동해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는 5월 10일 청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대와 벌금 20원 형을 받았다. 정부는 그 공훈을 기리어 1995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이용학(李容學)

이용학은 송인식, 민병철, 박병철, 박제성 등과 4월 2일 대소면 만세시위를 주도했으며, 만세시위 중에 체포돼 재판받아 태형 90대를 받았다.

△민병철(閔丙哲)

민병철은 송인식, 박병철, 박제성, 이용학 등과 함께 4월 2일 대소면 오류리 하오마을 뒷산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박영록(朴永錄)

박영록은 민병철, 박병철, 박제성 등과 4월 2일 대소면 만세운동을 주도한 애국청년으로, 입건돼 재판받아 태형 90대를 받았다.

△박제성(朴濟成:1902~1970)

음성이 본관으로 박서 장군 21세손, 중현(中鉉) 아들인 박제성은 대소면 오류리에서 출생했다. 후덕하고 온화한 천성으로 불의에 굴하지 않는 정의심이 강한 그는 4월 2일 대소 오류리 하오마을 만세시위에 민병철, 박영록 등과 계획.추진하여 시위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는 5월 10일 청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90대를 받은 후, 태독으로 농사를 짓지 못해, 오미장터에서 어물가게를 경영했지만, 일제로부터 심한 훼방과 핍박을 받았다. 그의 공훈을 기려 정부는 1995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보라! // 대한독립 만세! / 애국애족의 함성 / 지축을 뒤흔들고 / 하늘을 꿰뚫어 / 살아 숨을 쉰다. // 반제(反帝)에 투혼으로 얽혀 / 일천 여 열사들은 /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 물밑에선 나의 조국 / 굶주림과 혹한으로 가득차 / 귀 막고, 눈 막고 36년 // 기미년 4월 2일 오미장터! / 왜경의 총검 앞에 / 최후의 한 사람까지 / 민족혼은 영원히 살아 / 단군의 터전을 지켰다. // 이제 / 선열들의 죄값으로 / 국치의 설욕을 다지며 / 해와 달은 / 조국 깃발을 휘날리게 했다. // 하늘과 땅이 어우러 / 포근한 이곳 우리의 터 / 가슴 깊이깊이 새겨 / 내일을 열리라.” --최진섭 시, ‘3.1독립운동만세 추념시’ 전문--

대소면민 3.1절 만세재현 모습.
대소면민 3.1절 만세재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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