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천1리 뱅거리 마을

음성읍 초천1리 뱅거리마을 회관 전경.
음성읍 초천1리 뱅거리마을 회관 전경.

지금부터 103년 전인 1919년 3월 1일, 일제로부터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4월 말까지 전국에 들불처럼 번졌다. 음성군에서는 3월 18일부터 4월 11일까지 약 24회에 걸쳐 시위가 전개됐으며, 3천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3-4월을 보내며, 본보는 음성군 독립만세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이번 호에는 음성읍에서 펼쳐졌던 ‘독립만세운동’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편집자 주--

3.1독립만세운동 유적비 모습.
3.1독립만세운동 유적비 모습.

■ 음성읍 만세운동은 어떻게 전개됐나?

음성군 만세운동은 3월 1일 서울에서 최초 의거후, 18일이 지난 후에야 시작됐다. 3월 18일 천도교도 김두환(金斗煥).김용진(金龍鎭).양준성(梁俊成).신광로(辛光魯) 등이 수천 명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읍내 일대를 활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제 기록에는 없다.

다음날인 19일에는 소이면의 김을경(金乙卿)을 중심으로 이중곤(李重坤)·권재학(權在學, 在信)·추성렬(秋成烈)·이용호(李龍浩)·이교필(李敎駜) 등이 읍내리에서 시위가 전개됐다. 이들은 오전 11시경 읍내리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군중들과 독립만세를 부르며 경찰주재소로 이동해 주재소를 포위하고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3월 28일은 장날, 읍내 장터에서 장에 나온 많은 사람들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날 만세운동은 초천리 김영익(金榮翼)이 백양서당에 다니던 같은 정민영(鄭玟永)·최만득(崔萬得)·정대영(鄭大永)·정문영(鄭文永) 등과 주도했다. 이들은 거사에 필요한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ㆍ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했다. 김영익은 만세운동을 준비하며 “지금 조선 내 각지에서 조선 독립을 희망하여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대국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다”면서 “우리 일동도 내일 음성 읍내 시장에 나아가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장에 나온 군중에게도 선동하여 동일한 행동을 하게 하자”고 말하기도 했다.

오후 4시경, 김영익 등은 장터로 나가 쌀가게 앞에서 선언서와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군중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장 일대에서 행진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결국 김영익은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정민영·정대영·최만득은 태90도 처분을 당하였다.

3월 29일에도 읍내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으나, 일제의 사전 탐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4월 5일에는 군중 3,000여 명이 군청부근에서 만세를 불렀는데, 일경의 발포로 제지됐다.

4월 6일 밤 9시 경에도 신천리 산 위에서 5백여 명이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날 신천리 횃불만세운동은 경찰과 보병이 출동해 해산시켰다.

애국지사 김영익 선생 의열추모비 모습.
애국지사 김영익 선생 의열추모비 모습.

■ 음성읍 만세운동 유적은?

이와 같이 음성읍에서도 5회 이상 만세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음성읍 만세운동 유적은 현재 두 곳만 남아 있다. 초천1리 구례골 마을회관 앞에 위치한 ‘애국지사 김역익 선생 의열추모비’와 뱅거리 마을회관 앞에 세워진 ‘3.1독립만세운동 유적비’가 그곳이다.

△3.1독립만세운동 유적비(三.一獨立萬歲運動遺跡碑)

‘정민영(鄭玟永) 3.1독립만세운동비’로도 불리는 3.1독립만세운동 유적비는 1987년 8월 15일, 초천1리 뱅거리(백양마을) 마을회관 앞에 세웠다. 이 비는 1919년 3월 28일 오후 4시, 서당 동료들과 음성읍(陰城邑) 시장에 집결해 준비해 간 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운동을 선도하던 중. 일경에 체포된 애국지사 정민영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 애국지사 김영익 선생 의열추모비(愛國志士 金榮翼 先生 義烈追慕碑)

‘애국지사 김영익 선생 의열추모비’는 1919년 3월 28일 오후 4시 음성시장에서 서당 동료들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애국지사 김영익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다. 1996년 11월 22일에 구례골(덕전마을) 마을회관에 세워진 이 비에는 김영익 재판 판결문과 후손 재선 씨 등 유족 명단도 기록돼 있다.

음성읍 초천1리 뱅거리마을 전경.
음성읍 초천1리 뱅거리마을 전경.

■ 김두환.김용진&김영익.정대영.정민영.최만득

△김두환(金斗煥).김용진(金龍鎭)

김두환, 김용진은 천도교인으로서 1919년 3월 18일 신광로, 양준성 등과 함께 음성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주창하고 시위행진을 주도했다.

△김영익(金榮翼. 1898~1957)

안동(安東)이 본관인 김영익은 ‘삼봉’(三鳳)이라고도 불렸다. 음성읍 초천리 148번지에서 수홍(壽洪)의 아들로 출생한 김영익은 서울에서 살다가 내려와, 1919년 3월 27일 정기선(鄭騏善)의 백양서당(栢陽書堂)에서 서당학생 정문영, 정대영, 최만득에게 장날을 이용, 독립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제안했다. 이어 3월 28일 하오 2시경 음성시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했다. 다시 4월 6일 밤 산 위에서 약 5백여 명 군중과 횃불을 들고 시위하다가 3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같은 해 7월 18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199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정대영(鄭大永.1901~1953)

정민영은 음성읍 초천리 881번지에서 백양서당(栢陽書堂) 훈장 기선(騏善)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이 초계인 그는 1919년 3월 28일 김영익, 최만득, 정민영 등과 함께 음성시장 만세시위와 4월 6일 밤 횃불시위를 주동하다가 체포되었다.

△정민영(鄭玟永,1901~1970)

정민영은 1901년 1월 7일 음성읍 초천리 881번지에서 문묘 직원이던 정모선(鄭謨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백양서당에 다니던 정민영은 평소 알고 지내던 김영익으로부터 3·1독립만세운동 확산 상황을 듣고, 음성읍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그는 또한 백양서당 동료 최만득, 정대영 등과 함께 3월 28일 음성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거사에 필요한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했다. 드디어 3월 28일 오후 4시 정민영은 동료들과 함께 음성시장에 집결해 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포하고, 만세 운동 선두에서 시가행진을 하다. 4월 6일 밤에도 횃불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해 4월 11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대를 선고받아 상고했으나, 5월 5일 경성복심법원,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돼 형(刑)을 받았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최만득(崔萬得.1900~?)

최만득은 1900년 음성읍 삼생리 37번지에서 형묵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최만득은 백양서당 생도로, 서울에서 내려온 김영익과 함께 서당동료 정민영, 정태영 등과 의거를 주동해, 1919년 3월 28일 음성시장 시위와 4월 6일 초천리 횃불시위에 앞장서다가 체포됐다. 이로 인해 왜경에게 갖은 고초를 당한 그는 외지로 피신한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다.

음성읍 만세운동의 진원지, 초천리 뱅거리는 기자가 종종 찾는 곳이다. 3.1독립만세운동 103년을 맞아 뱅거리 마을에서 기자는 다음과 같은 시를 쓴다.

“통미 마을 지나 고개 넘으니 / 아기 볼기짝만한 골짜구니에 / 산 그림자만 방문하고 / 사시사철 햇살은 짧기만 한데 / 기미년 3월 1일 함성처럼 / 꽃잎이 눈발처럼 흩날리는데 // 회관 앞에 떡 버티고 선 비석 / 잠잠하던 읍내 깨우려고 / 목청껏 만세 부르려고 / 언제든 뛰쳐나가려고.” --기자의 졸시, ‘뱅거리’ 전문--

3.1독립만세운동 유적비 뒷면 모습.
3.1독립만세운동 유적비 뒷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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