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수필가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시기가 있다는 뜻이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나게 될 인연은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이고 애를 써도 만나지 못할 인연은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법정 스님의 <시절 인연>이라는 글에 나오는 문장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 이즘에서야 조금씩 깨닫는다. 우리가 스쳐 지나는 모든 사물과 소소한 일상까지도 어찌 보면 잠시 잠깐의 인연일 뿐이다. 그저 작은 인연의 닿았음을 배워간다. 그것도 모르고 내게 오면 달아날까, 놓칠까 애면글면, 안절부절못하고 살아왔다. 그동안 내게로 왔다. 멀어져 간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가만히 눈을 감고 기억들을 헤집어 본다.

언제나 그랬다. 다가오는 사람들은 모두 내 사람이라 생각해 속마음까지도 모두 터놓곤 했다. 하지만 종종 내 마음을 할퀴곤 떠나 버린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벽을 세우고 내 안의 우물을 파곤 했다. 점점 깊어지는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는 다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다짐도 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관심도, 다정함도 헤프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하지만 그런 나의 결정이 잘한 건지는 의문이다. 사람 관계의 무딤이 엉뚱한 쪽으로 깊어졌으니 말이다. 귀한 화초를 보면 탐이 나 값이 좀 나가더라도 구해서는 우리 집 화단에 꽂아 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다 보니 화단에는 질서도 없이 화초들이 빽빽하다. 그러한 나의 관심은 화초뿐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길고양이나 길 강아지를 내치지 못하고 군식구로 받아 주곤 한다. 그중 몇 마리는 우리 집 마당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아 곁을 내어주는 녀석들이 있다. 그 녀석들은 ‘내 거’가 되어 이름도 지어주고 내 전화번호도 새겨 넣은 목걸이를 걸어준다. 너무 과하면 탈이 난다고 했던가. 그렇게 ‘내 거’가 된 강아지와 고양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마다 마음을 추스르기가 쉽지가 않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어도 이상하게도 또 나는 길을 떠도는 생명들을 받아 주는 일을 포기할 수가 없다.

시절 인연이라는 것이 모든 것은 다 때가 있어 내가 만나고 싶지 않아도 그때가 무르익으면 만나게 되고, 또 내가 만나고 싶어도 때가 되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다는데 나는 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작년 봄, 동물병원 앞에서 잃어버린 고양이 ‘밤이’와 범백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곰이’, 그리고 올해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난 강아지 ‘몽이’, 그 외에도 우리 가족이 되어 살다간 수많은 동물은 아직도 내 핸드폰에 그 모습이 저장되어 있다. 나는 아직도 녀석들이 보고 싶어 종종 꺼내어 들여다본다. 내가 잘못하여 그렇게 된듯하여 죄책감에 사로잡힌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시절 인연으로 여기려고 한다. 그동안 내게로 왔다 간 모든 인연들, 사람뿐 아니라 동물도 모두 말이다. 때가 되어 왔다 또 때가 되어 떠난 것이니 힘들었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리라.

며칠째 때 이른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다. 비라도 한 줄금 내렸으면 좋으련만, 하늘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기만 하다. 고추며 상추는 무더위에 비들비들 한데 마당에 난 잡초는 왜 저리도 무성한지 모르겠다. 어쩌다 저 풀들은 나와 뽑고 뽑히는 악연으로 얽힌 것일까. 참으로 약속하기만 하다. 그래도 어쩌랴. 저 풀도 나와 인연이 있어 그런 것을. 그러고 보면 풀들은 벌써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눈에 보이는 풀을 미끼로 은밀히 자신의 씨앗을 퍼트려 나와 시절 인연이 닿지 않도록 한 건만 보아도 그렇다. 뽑고 뽑아도 어디서 날아와 마당을 점령해 대니 속수무책이다. 그렇다면 아뿔싸, 저 풀들은 이미 해탈의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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