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영(청주고등학교 교장)

큰 눈이 내리던 지난 5일은 아버지 생신이셨다.
아버지께서는 일제(日帝)의 강점기에 예조참판을 지내신 증조부님(陰城郡誌 名官篇)과 조부께서는 사천현감을 지내시고 합일합방후 “십일불식(十日不食)하시어 자절(自絶)” (陰城郡誌 節義篇)한 가문의 손자로 태어나셨다.

부친께서는 초시(初試)에 급제(及第)하신 후 동산에 난정(蘭亭)을 세우시고 팔도유행들과 춘추로 시작(試作)을 하시며 청빈하게 살아 오셨으니 팔남매의 둘째인 아버지께서는 물려받은 재산 없이 지주(地主)의 맏딸인 어머니와 결혼하셨다.

신혼 초 남매와 사랑하는 아내를 뒤로 한 채 일제의 강제 징병으로 사지(死地)로 끌려 가셔야 했고, 광복 후에는 국군으로 복무하셨고, 50년대의 어려운 시절에는 7남매를 위해서 공직을 사직하신 후 밤을 낮 삼아 생활하시며 자수성가하셨다.

어려운 생활속에 남에게 베풀 수는 없었고 수입에 맞추어 생활하고 그 중에도 저축을 하시며 어려운 세월을 살아오셨다.
처가나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신 채 남들은 조반석죽도 어려운 시절에 7남매를 구김살 없이 키워오셨다.
젊은시절 남들이 부러워하던 아버지의 건강도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는가 보다.
얼마 전에 모시고 음식점에 갔으나 식사량이 줄으셨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뵙지 못하며 제자들에게 효(孝)를 운위(云謂)하는 불효자는 부끄럽기 그지없다.
절제(節制)생활이 몸에 배신 아버지께서는 손에 돈을 들려 드려도 쓰지 않으신다.
생신을 앞두고 아버지께 새 시계를 채워드리니 50년 전 청주고 1학년 시절에 하숙집을 찾으신 아버지께서는 차고 계시던 시계를 자식에게 채워주시고 자식에게만 국밥 한 그릇시켜 주시고 먹는 모습을 지켜보시던 아버지 모습이 떠오르며 늘어 가시는 주름 속에 풍수지탄(風樹之歎)의 안타까움만 더해간다.

부모님의 뼈를 깍는 남다른 노력이 계셨기에 오늘 이곳에서 후학들을 교육하며 안정된 생활을 하며 교직자의 길을 걷고 있다.
79년 모교인 청주고에 부임하여 학생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분은 나의 부모님이라고 말했다.
봄바람 속에 꽃 피는 봄을 기다리며 아버지께서 학수천세(鶴壽千歲)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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