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재 영 전청주고 교장 ∙ 칼럼니스트

 
 

목련이 진 자리에 새 잎이 나며 겨우내 앙상한 가지가 연녹색으로 단장을 하여 세월의 흐름을 일깨워주니 마음은 고향으로 달려가고 어린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저 멀리에서 마을을 감싸 안는 백마산을 바라보며 마을 앞동산에서 뛰놀며 어린시절 동산에 진달래 피는 봄이면 6.25전쟁 후의 폐허 속에 주인 잃은 정자를 돌며 숨바꼭질 하며 뛰놀던 때가 어제 같은데 반 백년의 세월이 흘렸으니 “세월의 흐름이 부싯돌불빛(石火光中)같다”는 채근담(採根譚)의 말이 실감난다.

나이가 들어서야 정자의 이름이 난정(蘭亭)이고 조부님께서 초시(初試)에 급제(及第)하신 후 춘추로 마음 맞는 팔도유생들과 시작(詩作)을 하시며 일제하(日帝下)의 암울한 세월을 보내셨음을 알게 되었다.

조부님께서는 백마산 풍월주인(白馬山 風月主人)이라 하셨고, 자연을 벗 삼아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세월을 낚으셨다.

자연을 벗하며 풍류 스런 사람을 풍월주인(風月主人)이라 했고, 정극인(丁克仁)은 상춘곡(賞春曲)에서 “송죽(松竹) 울울리(鬱鬱裏)에 풍월주인(風月主人)되어서라”고 했고, 옛 문헌에 명필인 왕희지는 난정(蘭亭)에서 난정서(蘭亭書)를 썼다하니 이루 미루어 보아 조부님께서 세우신 난정(蘭亭)이란 정자 이름과 풍월주인(風月主人)으로 자처하시였고 연로하신 촌로(村老)들의 말씀과 같이 떠도는 사람들에게 숙식(宿食)을 제공하셨다하니 자연을 벗 삼아 풍류(風流)를 즐기셨고, 베푸는 삶 속에 보내신 세월이셨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조모님께서는 정부인(貞夫人)이셨던 시할머니와 숙부인(淑夫人)이셨던 시어머니의 그늘 속에 조부님의 뒷바라지를 하셔야 했고 먼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우시며 팔남매를 키우셨으니 어렵고 힘든 세월이셨다.

어릴 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 늘 상 보아오던 사진과 문헌을 통해서 선비로서 살다 가신 조부님의 발자취를 알 수는 있지만 베풀지 못하는 삶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보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뜰 앞에 핀 꽃들을 바라보며 조상에게 부끄럽지 않는 생활을 해야 할 텐데 혼자서 독백(獨白)처럼 뇌까리다보니 7월에 접어들어 여름이 되었다.

할머님께서는 젊으셨을 때는 11대 종가(宗家)의 맏며느리로 가정의 대소사를 맡으셔야 했고, 떠도는 사람들에게 숙식(宿食)을 제공하시던 조부님의 뜻에 따라 영일(寧日)이 없으셨다. 할아버지께서 해방 전 돌아가신 후에는 팔남매를 혼자 키우시며 집안의 어른으로, 마을의 어른으로 큰 자리를 지켜오셨고, 근엄 하시면서도 정(情)이 많으셨다. 백부님께서는 효성이 지극하시어 매년 할머님 생신은 집안의 잔치요, 동네  잔치 날이 되었다.

정부인(貞夫人)이셨던 시할머니와 숙부인(淑夫人)이셨던 시어머님, 구한말에 예조참판을 지내신 시조부님(陰城郡誌 名官篇)과 시아버지께서는 사천현감을 지내시고 합일합방후 “십일불식(十日不食)하시어 자절(自絶)” (陰城郡誌 節義篇)한 가문을 지켜오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초시(初試)에 급제(及第)하신 후 음성군원남면보천리시장(보천역 기차길 옆) 동산에 난정(蘭亭)을 세우시고 팔도유행들과 춘추로 시작(試作)을 하시며 청빈하게 살아 오셨으니 팔남매의 둘째인 아버지께서는 물려받은 재산 없이 지주(地主)의 맏딸인(대소면수태리) 어머니와 결혼하셨다.

사천현감을 지내신 시아버지께선 청빈하신 생활로 물려받은 재산 없이 종가(宗家)를 지키시며 팔남매를 키우셨으니 어렵고 힘든 세월이셨지만 백부님께서는 50년대의 가난한 시절에도 엽총을 소지하시고 사냥을 하시어 할머님을 극진히 모셨다. 일제(日帝)의 강점기에 아들을 강제징병으로 사지(死地)로 보내시고, 6.25전쟁을 겪으시며 한시도 걱정이 그칠 날이 없으셨던 할머님. 모든 시름 잊으시고 어떻게 저희들 곁을 떠나셨는지? 할머님께서는 내가 교직에 들어와 충주에서 부부교사로 근무했던 아내와 신접살림을 할 때 손자가 어린증손녀를 데리고 사는 모습을 보시고 대견스러워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47년 전에 할머님 모신 상여가 떠나던 날 그렇게 목 노아 울었는데 할머님 생각이 잔잔한 마음으로 내 가슴에 남아 있으니 내가 불효(不孝)인가 보다. 얼마 전 귀향길에 백부님 댁에 들렸더니 정적이 감돌며 무성하던 대추나무는 자취를 감추고 그루터기만 남고 어린시절 친구들과 뛰놀던 마을에는 여기저기 빈집이 버려진 채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 덧없는 인생임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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