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설희 수필가

 
 

고추 꼭지는 힘이 세다. 생각 없이 고추를 따다가는 꼭지 없는 고추를 따게 된다. 다른 지역은 꼭지 없이 따는 곳도 있다지만 잘못 말리면 꼭지 주변만 색이 달라져 희나리가 된다. 희나리는 상품 가치가 없다. 남들이 보면 고추는 똑똑 잘 따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격다짐이다. 어떨 때는 줄기까지 딸려 올 때도 있다. 생각해 보면 한여름 뜨거운 볕에도 살아남은 고추다. 나보다 힘이 센 게 당연하다.

고추를 딸 때는 꼭지도 잘 붙어 있어야 하지만 뒷부분까지 빨갛게 잘 익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고춧잎이 그늘져 가끔 다 익지 않는 고추를 딸 때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붉어지기는 하지만 그대로 말리면 희나리가 된다. 풋고추는 상관없지만, 홍고추로 팔 때는 신경 써야 한다. 붉게 잘 익어야 한다.

잘 익은 고추를 보니 새삼 시간이 빠르다. 고추 심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9월이다. 시골 일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까지 고추를 따냐고 놀란다. 고추는 기본 3번은 딴다. 병만 오지 않는다며 5번까지는 따지만, 요즘은 병이 오면 고춧대를 다 잘라버린다. 아빠는 이번에 고추를 따면 고춧대를 자를 거라 했다.

요즘은 엄마와 단둘이 고추를 딴다. 한꺼번에 많이 딸 필요가 없어졌다. 일당도 많이 올랐지만, 기름값도 올랐다. 그래서 기름을 쓰는 벌크를 돌리지 않고 전기 건조기로 고추를 말린다. 건조기는 3칸으로 13포대가 들어간다. 13포대면 엄마와 아침 9시에 나와도 충분히 딴다.

고추와 옥신각신하며 엄마에게 오늘 점심은 무언지 물어본다.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질문이다. 나는 알면서도 물어본다. 여름 내내 우리 가족은 면 종류를 참 많이 먹었다. 라면, 잔치국수, 메밀국수, 냉면, 짜장면, 냉 짬뽕, 냉우동……. 점심엔 면이 편하다. 설거지도 편하고 김치 반찬 한 가지만 있으면 된다. 다행히 우리 가족은 면을 좋아한다.

엄마와 한참 먹는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엄마가 웃었다. 물어보니 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어떤 젊은 사람이 풋고추가 익으면 빨간 고추가 되는 건지 몰랐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이 거짓말 같으면서도 깻잎이 들깨에서 따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기에 이해는 갔다. 자라는 과정을 모르면 그럴 수 있다.

20대 나는 자라기에만 급급했다. 이른 나이의 성공이 진짜 성공인 줄 알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만 가치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천재에 열광했고 글을 잘 쓰기 위해 작법서 위주로 책을 읽었다. 내가 글을 못 쓰는 이유는 기술이 없어서라고 생각했고 등단한 또래의 글들을 보며 좌절했다. 나는 재능이 없었다.

그 시절 나는 거의 글을 쓰지 않았다. 책도 안 읽었다. 해마다 챙겨보던 신춘문예 소설도 읽지 않았다. 그래도 표면상은 작가 지망생이었다. 그 말마저도 부끄러웠다. 부모님이 시키면 일을 했고 일을 안 시키면 게임을 했다. 게임이 지겨우면 인터넷을 했다. 고통이 내 일과였다.

갈색 고추에 시선이 간다. 그늘진 고춧잎 사이로 보니 검은색처럼 보이기도 하고 보라색처럼 보이기도 한다. 익어가는 중이다. 풋고추가 홍고추가 되기까지 색은 서서히 변한다. 푸른 것이 익으면 붉은 것이 된다. 신기하다. 물고기가 새로 변하는 것처럼 교차점이 없어 보이는데 푸른 것이 익으면 붉은 것이 된다. 고추만이 아니다. 모든 자연이 그렇다. 나는 갈색 고추를 보며 고통의 색깔은 이런 색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아무것도 안 하고 세월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한 20대. 나는 천천히 익어가고 있었다. 풋고추가 홍고추가 되기까지 고추는 주어진 대로 그 자리에서 익어갔다. 볕에 주어지면 볕을 받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았다. 그렇게 자신을 변화시켰다.

그때 유일하게 썼던 것은 일기였다. 나에게 일기는 쓰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냥 내 일상을 적은 메모이지 낙서였다. 그런데 백일장에서 그 이야기를 썼더니 운 좋게 상을 받고 등단까지 했다. 상을 받는 건 좋았지만 정말 받아도 되는 걸까 걱정했다. 실수가 아닐까? 나중에 취소시키는 게 아닐까? 나는 늘 쓸데없는 걱정이 앞선다.

가끔 지난 일기장을 본다. 새삼 내가 자랐음을 느낀다. 익어가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때는 다 힘들었다. 다 괴로웠다. 즐거운 날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날뿐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그때와 상황이 변하지 않았어도 힘들게 안 느껴졌다. 예전 같으면 아침 9시에 고추를 따도 화가 났을 텐데 요즘은 라디오를 들으면서 고추를 따니까 재밌다. 그사이 면허도 따서 이제는 내가 차를 끌고 밭으로 간다. 오늘도 차를 끌고 밭으로 왔다.

나는 어느 정도 익었을까. 껍질이 두꺼운 나는 빨리 익지 못할 것이다. 아직 여물지 못한 심지가 느껴진다. 고집 센 고추를 수확하며 익어가는 나의 색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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