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수필가

 
 

어린 시절, 겨울이 되면 우리 집 안방에는 콩나물시루가 가족처럼 한자리를 차지했다. 구석이긴 했어도 아주 춥지도 않은 자리였다. 우리 형제들은 학교를 갔다 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는 일이고, 잠에서 깨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도 콩나물에 물을 주는 일이다.

잠이 덜 깬 채 일어나 앉아 멍하니 있으면 엄마는 어떻게 알았는지 부엌에서 콩나물에 물을 주라며 소리를 지르셨다. 콩나물은 물만 먹어도 잘 자라지만 물주는 간격이 길어지면 잔뿌리가 제멋대로 나오게 된다. 잔뿌리가 많은 콩나물은 연하지도 않고 오히려 질긴 맛이 나 뿌리 부분을 잘라내야 한다. 엄마는 밤에도 주무시다 시루에 물을 주시곤 하셨다.

요즘은 콩나물이 마트에 가면 언제든 살 수 있는 있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콩나물은 시골 구멍가게에서는 팔지 않았다. 더구나 콩나물은 물은 자주 줘야 하는 까다로움이 있다. 때문에 겨울을 빼고 다른 계절은 바쁘기도 해 콩나물에 물을 줄 수 있을 만큼 집에 장시간 집에 머무는 사람도 없었지만, 지천에 푸성귀가 있어 굳이 콩나물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고 보니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것이 콩나물인 셈이다. 겨울철 엄마가 우리 집 시루에 안친 콩들은 온전한 것도 아니었다. 갈무리가 된 곡식이 아닌 밭에 떨어진 콩 이삭이었다.

우리 집은 남의 밭을 빌려 농사를 지었는데 주로 작은 밭이었다. 그 작은 밭에는 고구마나 들깨 등을 심으셨다. 그러니 콩은 대부분이 남의 밭에서 주운 이삭이었다. 엄마는 겨울에도 쉬는 법이 없으셨다. 남의 빈 밭에 떨어진 이삭들을 주워다 그렇게 자식들을 먹여 살리느라 손발은 갈라지고 거칠었다. 철없던 시절, 잠결에 내 볼을 쓰다듬는 엄마의 손길을 느끼면 짜증을 부리곤 했다.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린다.

지금도 나는 엄마가 해 주시던 콩나물 찌개를 자주 끓인다. 국물은 자작하다. 빨갛고 얼큰한 맛이다. 콩나물 찌개 하나면 다른 반찬은 필요 없다. 엄마는 겨울 아침이면 그렇게 자작한 국물에 얼큰한 콩나물 찌개를 끓여 주셨다. 그 맛을 잊지 못해 나도 자주 끓이게 되는데 내 아이들도 엄마의 콩나물 찌개를 무척 좋아한다. 물론 그 시절의 콩나물 맛과 지금의 콩나물 맛은 다르다. 그래도 나는 엄마가 그리운 날이면 콩나물 찌개를 끓인다.

그러고 보면 물만 있으면 자라는 콩나물이 참 대견하기도 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시루에 안친 콩나물은 아무리 물을 주어도 물을 머금는 법은 없다. 그럼에도 물만 자주자주 주면 딱딱하던 콩이 어느새 쑥쑥 자라나 통통하고 아삭한 나물이 된다. 다만 햇볕이 들지 못하고 습기가 날아가지 않게 해 준다면 말이다.

단순한 콩나물 재배법의 위대함을 새롭게 다가왔던 순간이 있었다. 얼마 전이었다. 검정고시 수업이 끝나고 칠판 가득 써 논 수업 내용을 지우고 있었다. 가방을 챙겨 나가시던 어르신 학습자가 나에게 던지신 말씀이었다.

“우리는 콩나물이래요. 시루에 안친 콩나물이요. 물이 시루 구멍으로 다 빠져나가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것 같지만 콩나물은 어느새 쑥쑥 잘 자라나잖아요. 저희 목사님이 그러셨어요. 설교를 자주 듣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마음이 꽉 차 있지 않냐구요. 우리 수업도 그런 것 같아요.”

나는 갑자기 무언가가 가슴에 쿵 닿는 느낌이었다. 그런 것이었구나. 그동안 수업을 하다 보면 어르신들은 공부가 너무 어려워 머릿속으로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많은 어르신은 합격을 하시고 만다. 힘드시다 어렵다 하시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셔서 꾸벅꾸벅 조는 순간들도 있지만,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으로 수업을 들으셨다. 그런 시간들은 결국 내가 콩나물에 물을 주는 시간이었고,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 보였지만 쑥쑥 자라나는 시간이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이런 게 바로 콩나물 공부법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동안의 시간이 이리도 소중했으니 앞으로의 시간도 허투루 보낼 일은 없을 듯하다.

콩나물이 다시금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어렵고 힘든 어린 시절, 잘 버티고 지금 이렇게 잘 살아가게 해 준 것도 결국 엄마의 사랑이었음을 알았다. 끊임없이 시루에 물을 주듯 우리 형제들을 위해 손발이 나무껍질이 되도록 사랑을 준 엄마, 오늘따라 왜 이리도 사무치게 그리운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콩나물 찌개로 그리움을 달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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