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마을 형태의 3곳으로 분구,절실히 요구

감곡 주천리 마을 전경
감곡 주천리 마을 전경
이장 유기복,노인회장 김준한,새마을 지도자 유기현,부녀회장 신용숙,개발위원장 유숭열....

□ 밥맛 최고의 미질 각광

음성군에서 장호원 방면 국도 37호선을 타고 가다보면 생극면 시가지를 지나 감곡면으로 들어서면서 아담하게 자리잡은 주천리가 눈에 들어선다.
주천리가 위치해 있는 곳은 평야지대로 돼 있어 마을 형태가 새터말, 토둔, 도화동, 고야리 등 네곳으로 분산돼 있다.

이러다보니 주천리 주민들은 오랜 바램을 갖고 있다.
주천리로 돼 있으나 마을발전을 도모하고 마을 주민들간의 화합을 꾀하기 위해서는 네곳으로 분산된 마을을 분구로 획정하여 줄 것을 희망하고 있다.

주천리로 통합돼 운영되고 있는 마을형태를 샛터와 도화동을 통합 분구하고 토둔과 고화리를 단일 분구로 획정하는등 세곳으로 분구하여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주천리는 본래 충주군 감미곡면 지역이었으며 청미천 동남쪽 한 냇가에 있었으므로 주내, 혹은 주천이라 하였다.

조선 고중 광무 10년(1906)에 음성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주리, 외주리, 이부를 편입하여 주천리라고 하여 감곡면에 편입되었다.
주천리 주민들의 주 수입원은 벼농사와 복숭아 농사로 고수익을 올리고 있으며 주천리 일대에서 생산되는 쌀은 경기도 이천쌀보다도 우수한 미질을 갖고 있어 수확철 출향인들로부터 주문이 쇄도할 정도이다.

□ 위치

주천리는 감곡면 소재지에서 남쪽 6km 지점에 위치하며 동으로는 영산리, 서와 남으로는 원당리, 북으로는 오향리와 접하고 있다. 주천리는 새터말 토돈, 고야리, 골배내, 구른들의 5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있다.
주천리 일대 논은 충북도내에서 최초로 경지정리를 한 곳이며 농촌 마을치고는 비교적 빠르게 1963년 전기가 들어와 마을 발전을 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 자연마을명과 주요지명

○ 새터말 - 새터말(대둔)마을은 주천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고야리 북쪽 도로변에 있는 마을이며 근년에 마을이 생겨 새터 말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1940년대까지는 대둔이라 불렀다.
▲ 담안골 : 새터말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암수골 안에 있다.
▲ 안수골 : 담안골 안쪽에 있는 골짜기
▲ 피나무재 : 담안골과 암수골앞 새터말 동쪽에 있는 들로 피나무가 많았다고 하나 현재는 없다.

○ 토돈 - 토돈마을은 대둔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터가 높은 지대가 됨으로 흙이 두둑하다는 뜻으로 토돈이라고 한다.
▲ 마루들 : 토둔 북쪽에 있는 들
▲ 자점보 : 토둔 서쪽에 있는 보로 조선 인조때 김자점이 장호원읍의 백족산에 아버지의 묘를 썼는데 묘자리가 비룡상천으로 용이 승천하려면 물리 있어야 한다고 하여 이 보를 막았다는 전설이 있다.

○ 고야리 - 고야리 마을은 토둔(자운정사) 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지형이 반달형으로 되어 있으며 달이 잘린 것 같다하여 궤월이라 하였다.
▲ 감곡교 : 고야리 남쪽에 있는 다리로서 1947년에 축구되었다.
▲ 개사리 : 고야리 북쪽에 있는 들로 새터에도 있다.
▲ 작은원댕이 : 고야리 서쪽에 있는 작은 들로 원당리 북쪽이며 마을이 있었으나 풍수해로 없어졌다.
▲ 장군제 : 고야리 동쪽에 있는 곳으로 지금은 확장하여 감곡저수지가 되었다. 옛말에 어떤 장군이 막은 것이라고 전한다.
▲ 종자바위 : 고야리 남쪽에 있는 바위로 남자의 성기와 같다하여 종자바위라하며 장군이 놀던터라고도 한다.

○ 골배내 - 골배내마을은 고야리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서쪽의 냇물지형이 행주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은 그 배가 머무는 항구가 된다하여 안쪽 골짜기의 뜻으로 골배내라 한다.
▲ 두리봉 : 골배내 북쪽에 있는 산
▲ 사당골 : 골배내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잔자골 고개 : 골배내에서 영산리 잔자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골배내 위쪽에 있다.
▲ 바리고개 : 골배내에서 영산리 공산정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골배내 아래쪽에 위치▲ 황새골 : 새터에서 골배내로 들어오는 입구 남쪽 골짜기로 예전에 황새가 집을 짓고 살았다고 전한다.

○ 구른들 - 구른들 마을은 골배내 북쪽에 있는 마을로 토질이 매우 비옥하여 곡식이 잘되는 구른들에 있는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그른들 또한 경지정리로 인해 새터에 편입되었다.

□ 전설이 얽혀있는 곳

▲선신바위

옛날 선신바위라는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에 앉아서 불공을 드리면 선신이 되어 올라간다고 하는 전설이 있었고, 전설대로 정말 하루에 스님이 한 분씩 승천하여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지막 스님에게 스님 어머니가 고춧가루를 넣어지은 옷을 주어 입고 불공을 드리는데, 커다란 지네 한 마리가 하늘에서 쾅! 하고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새의 모양으로 변하여 어딘가를 향해 날아갔다. 도착한 곳은 주천리 근처의 어느 집이었는데, 그 곳으로 들어간 새는 사라지고 한참만에 할머니가 나오셔서 스님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지나 할머니는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17살까지 살다가 죽고 말았다. 지네가 변하여 아이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왜 그런 일이 생겼으며 그 이후에는 왜 아무 일이 없었는지 조금은 이해하기가 힘든 일이다.

▲ 지네굴

백족산 위에 절이 하나 있는데 만배를 드리면 승천을 한다는 전설이 있었다. 전설에 따라 다른 스님들은 모두 승천을 하여 떠나고, 제일 젊은 스님이 마지막으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젊은 스님은 마지막으로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러 집으로 갔다. 하지만 왠지 어머니의 마음은 걱정스러웠고, 노파심에 담배잎을 주머니에 넣어 주면서 그와 함께 담배 냄새가 진하게 밴 삼베옷을 입혀 주었다.

젊은 스님은 담배와 삼베옷을 가지고 절로 돌아와 승천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정성껏 만배를 올렸다. 그러자 하늘에서 커다란 지네가 쾅!하고 떨어지면서 스님을 잡아먹으려고 하였다. 너무 놀란스님은 허둥대면서 도망가려 하는데, 지네가 빠른 속도로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담배 냄새가 밴 삼베옷을 맡고는 잠깐 멈칫하고 놀라는 것이었다. ‘이 때다’싶은 스님은 재빨리 어머니가 준 담배잎을 지네에게 던졌고, 지네는 꿈틀거리다가 돌돌말린 상태에서 바위에 머리를 박고 죽어 버렸다.

그 후 사람들은 그 바위에 생긴 굴을 보고 ‘지네굴’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 마을을 이끄는 일꾼들

주천리는 자점이보를 보유하고 김자점이 백족산에 묘를 쓰고 막은보가 유명하다마을 발전을 위해서는 주민 화합이 우선이라는 슬로건 아래 유기복 이장, 유기현 새마을 지도자, 신용숙 부녀회장, 유숭열 개발위원장 등을 중심으로 하여 김준한 노인회장의 자문을 얻어 마을발전에 다같이 구슬땀을 쏟고 있다.

또한 샛터 지준성 전이장을 비롯한 송준용 감곡애향동우회장, 이한우, 김병호씨 등이 마을발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장호원 공고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여 고향에서 텃밭을 일구는 이진우 극동대 겸임교수(71)가 퇴직하면서 마을 장학금으로 1천만원을 내놓아 후학양성에 주춧돌이 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이교수는 방학을 맞은 주천리 청소년들에게 한문교육과 충효예절교육을 실시하여 인성교육을 배양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나가고 있어 지역주민들로부터 돈독한 존경을 받고 있다.
주천리 출향인사 가운데는 유창열 남양주시 교육장 정년퇴임 하였고 유연수 농지개량 조합장, 유주열 전 도의회 의장, 강승원 고명상고 교장 퇴임, 이제봉 양정여고 교사, 이종하 보건복지부 사무관, 정성호 감곡면 총무담당, 박성순, 유용희, 유광수, 유영희, 유재희씨 등은 현재 면에 근무하고 있다.

유기운씨는 행시에 합격하여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홍은표 예비역 소장으로 퇴역하여 전쟁기념관 관장으로 재직중에 있고 홍의표씨는 진로소주 이사로 퇴직했다.
이처럼 감곡면 주천리는 인재배출의 요람으로서 명성을 얻고 있으며 밥맛과 인심 좋은 마을로 인근 마을 주민들로부터 부러움을 사왔다.

<마을탐방/ 감곡면 주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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