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설희 수필가

 
 

아직 해가 있는 오후, 똘똘이를 데리고 길을 걷는다. 똘똘이는 몇 년 전 마을 사람이 준 진돗개다. 진돗개는 자기 집에서 볼일을 보지 않는다고 한다. 멀리 나가야 한다. 그래봤자 집 주변을 도는 게 전부다. 그런데 12월에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아 여전히 빙판이다. 작년 겨울에도 이렇게 눈이 안 녹았나 떠올려 보았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조금 더 포근했던 거 같고 그래서 이상기온이 아닐까 걱정했던 것 같다. 그래서 녹지 않는 눈이 반가우면서도 걸을 때마다 애를 먹는다.

국도는 거의 녹았지만 농로는 마을과 떨어졌고 경계가 모호하기에 눈을 치우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눈이 있는 곳을 밟으며 걷는다. 오히려 어설프게 녹은 곳이 더 위험하다. 아이젠을 신은 발목에 힘을 주며 천천히 걷는다. 장갑을 낀 손목에도 힘을 준다. 똘똘이가 언제 튀어 나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똘똘이는 길의 사정과 상관없이 쌓인 눈 속에서도 새로운 냄새를 찾아내고 킁킁거린다.

그에 반해 나는 천천히 바닥을 확인하며 조심스레 걷는다. 이미 몇 번을 넘어졌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다. 그렇다고 산책을 포기할 수 없다. 화장실을 가지 못하는 고통을 알고 있어 될 수 있으면 산책은 매일 나간다. 무엇보다 나는 산책이라는 핑계가 없으면 좀처럼 밖을 나가지 않는다.

눈이 녹지 않아서일까. 보름 넘게 쌓인 눈을 계속 보고 한 해를 넘기다 보니 올해는 겨울이 유독 긴 느낌이다. 논과 밭의 경계도 희미하다. 하얗게 공평히 덮인 땅은 원래부터 하나의 땅으로 보인다. 인간이 그은 선 따위는 자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그저 녹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분명 온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온통 하얀 눈만 보인다. 한때 나는 하얀 눈을 행운의 징조라고 여겼다. 눈이 내리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고 녹지 않는 눈을 보며 아직 행운은 나에게 떠나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눈은 단단히 굳어 녹지 않은 채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믿음이 사라진 눈은 그저 차가운 수분 덩어리다.

집 앞 농로를 두 번 왔다 하는 동안 똘똘이는 볼일을 세 번 보았고 그만하면 됐다 싶었다. 여름날 똘똘이는 볼일을 많이 본다. 영역표시도 많이 하지만 겨울은 그렇지 못하다. 짐승도 사람 못지않게 겨울의 영향을 받나 보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경사가 진 길을 천천히 올라간다. 여전히 해는 자신의 빛남을 자랑하고 있지만 따스함을 주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똘똘이는 볼일을 다 봐서인지 엉덩이가 가벼워 보인다. 아까보다 더 신나게 눈 속 이곳저곳을 파헤치며 냄새를 느낀다. 개는 인간보다 천 배에서 일억 배까지 뛰어나다고 한다. 내 눈에는 그저 흙이지만 똘똘이한테는 다른 의미일 것이다.

오늘은 다행히 넘어지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똘똘이의 목줄을 바꿔주고 사료를 그릇에 부어주었다. 이제야 긴장이 조금 풀어진 듯 어깨와 손목이 욱신거린다. 한동안 겨울 산책은 그럴 것 같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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