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수필가

 
 

한 도시를 상징하는 것은 많다. 특산물이나, 축제, 음식, 또는 건물이 되기도 한다. 근래에 들어 음성을 상징하는 것을 꼽으라하면 단연 ‘음성 문화예술회관’이 될 것이다. 음성읍의 외곽에 자리한 음성 문화예술회관은 타지 사람들에게 좀 의아한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렇게 작은 소도시에 웅장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모습의 문화예술회관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음성의 진입로 중 예술회관이 있는 쪽은 서울방향이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에게는 문화예술회관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음성의 모습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첫인상이 중요하듯 그 고장에 대한 첫인상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니 예술회관의 모습을 통해 음성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간파를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음성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제일먼저 반기는 음성문화예술회관은 어쩌면 음성을 대변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작은 소도시이지만 이곳에는 유독 예술인들이 많다. 때문에 예술문화회관은 음성 예술인들의 무대가 되기도 하고 자긍심이라 할 수 있다.

음성문화예술회관은 외양을 보아도 평범하지 않다. 그것은 사실 건물 자체에 많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천정과 벽이 둥근 모양을 한 중앙의 건물은 충북의 상징인 청풍명월을, 공연장과 객석은 음성의 소리가 음성 전 지역으로 퍼져나가라는 의미이며, 하늘 지붕을 지지하는 9개의 기둥은 9개 읍면을 상징한다. 예술회관의 정원과 주차장은 한국적인 건물배치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한국의 꽃담, 산성, 전통문양의 공간으로 전체적인 회관의 분위기가 부드럽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사실 음성에는 문화예술회관이 들어서기 전, 음성의 각종 문화 행사를 담당했던 곳이 있었다. 음성 시내의 북쪽에 자리했던 ‘음성 복지회관’이 바로 그곳이다. 복지회관은 1982년에 건립되어 30여년을 음성 사람들에게 많은 추억을 심어 준 곳이었다. 1980년대 우리나라는 반공 영화를 초·중·고 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단체 관람하게 했다. 내가 처음으로 음성복지회관을 간 것도 중학교 때 반공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복지 회관은, 영화 상영 뿐 아니라 음악회라든가, 유치원생들의 졸업 발표회, 각종 대회 등도 치러진 장소였다. 선거 때가 되면 후보자들의 유세도 그 앞에서 이루어졌고, 지인과의 약속 장소로도 단연코 손꼽히는 장소였다. 당시만 해도 음성을 대표하는 건물이었기에 음성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음성 사람들에게 많은 삶의 애환을 남겼던 복지회관은 30년 만인 2012년에 헐리고 말았다. 낙후된 시설은 행사 대여와 사용 횟수도 줄어들게 되어 많은 유지관리비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었다.

사실 음성복지회관이 사람들의 외면을 받은 데에는 이미 새롭고 아름다운 건물인 ‘음성문화예술회관’이 2008년에 개관을 하며 관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사람들은 낡은 복지회관에서의 행사를 꺼려했다. 나도 음성문화예술회관이 개관되고 몇 년 후 그곳에서 다목적실을 대여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는 논술교실을 운영했던 때였는데 학부모를 대상으로 입학설명회를 그곳에서 개최를 했다. 음성 관내의 학부모들이 정말 많이 참여해 성황리에 행사를 마무리했던 기억에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행사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장소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요즘은 음성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 ‘음성문화예술회관’에서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해마다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피아노 연주의 거장 유키 구라모토를 비롯한 백건우, 조수미, 금난새와 같은 세계적인 유명 예술인들의 공연은 물론이고, 대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연극을 비롯한 음악회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니 음성의 예술이 빛나지 않을 수 있을까. 가끔 다른 지역 사람들의 부러움 섞인 말을 들을 때는 저절로 어깨가 올라가곤 한다. 문화의 향기가 진한 음성, 그것은 ‘음성문화예술회관’의 찬란한 영광의 저 밑에 자리한, 이제는 과거가 되어 사라진 ‘음성 복지회관’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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