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진다.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정 들었던 가지와의 인연을 떨쳐버리고 한결같이 자신의 본향인 흙을 향해 하나, 둘, 흘러 내린다.
한때 지는 아름다움 보다는 사라짐에 대한 허무함에 절망하며 청춘의 한 때를 소진한 시절이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큰 실수 였는지도 모른다. 어쩜 그 들을 보살핀다는 명목하에, 인생의 도피처겸 삶의 허무함에 몸부림을 치면서도 죽음과 쉽게 손잡지 못하는 자신의 모순에의 탈출구로 삼았는지도 모를 불순한 동기로 그곳 아이들과의 생활은 시작 되었으니까 말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결코 온전하지 못한 아이들, 그들의 손과 발뿐만 아니라 온전한 정신까지 되어 주어야 할 자리였다. 그러나 주어진 몫을 묵묵히 해내는 조용한 21살된 보모선생님의 겉 모습과는 달리 나의 내면은 너무나 피폐해 있었다.
온전치 못한 그들을 보며 똑같이 온전치 못한 삶의 철학을 품은 억지로 삶을 영위하는 자신을 자학하고 또 자학해야만 했다.
인생의 참 경험도 아직 다 해보지도 않은 근시안적이고 흑백 논리적인 사고의 소유자에겐 그들의 인생은 자신만큼이나 가치가 없어 보였다.
아니 인생의 희노애락(凞盧愛樂)도 전혀 모른체 살아가는 모습이 끔찍스럽기 조차 하였다.
토해 낼 곳 없는 항변을 가득히 품은 채 저녁만 되면 옥상에 올라가서 어둔 마을의 반짝이는 불빛과 먼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터질 듯한 가슴을 밤이 늦도록 달래다 내려 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시작 되었다. 나 혼자만이 청승을 떨던 그 옥상의 구석에 언젠가 저녁때 부터는 또 다른 청승꾼이 서 있는 것이다. 예의 그 소년이었다.
언제나 약간 모자라는 표정에 말도 잘 못했지만 항상 웃으면서 콧노래만 흥얼거리던 예의 그 아이가 이제 더 이상 웃지도 노래를 흥얼거리지도 않고 우울한 표정의 다른 사람이 되어 돌부처 마냥 멍하니 서 있는 것이다.
담당하시는 보모 선생님께 얘기 해 보니 이 삼일 전부터 밥을 잘 안 먹고 전처럼 툭 하면 손 씻으러 세면장에 가는 일도 이젠 없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정신 박야아도 사춘기를 격는 아이가 있나 보다며 좀 더 두고 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틀쯤 후 였을까? 미명도 채 가시기도 전인 이른 새벽에 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모두들 놀라 일어난 때는......원장님이 누가 또 어린 애기를 문 앞에다 버렸나 생각하시며 달려나가 보았더니 그것은 뜻 밖에 이웃의 낚시꾼이 그 아이의 죽음을 알리는 비보였다.
원장님 내외, 선생님들과 원내 식구들이 저수지로 뛰어 갔다. 그 아이는 두 장의 가마니 속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가마니를 들어 보았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였을까? 마치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뜻밖에도 얼굴 표정은 마치 긴 여행을 끝내고 오랬만에 깊은 잠에
빠져 든 사람처럼 평안한 얼굴이었다.
코 밑에 약간의 핏자국만 뭍어 있을 뿐......가장 슬픈 것은 그 아이의 옆에서 진짜로 울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역시 버려진 고아였으니까. 사람들은 아이를 보자마자 놀란 듯 울고 불며 대성통곡하며 야단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나는 이 뜻밖의 죽음이 또 다른 이상한 충격으로 와 닿아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토록 무미건조하고 아무 생각도 고민도 못 한 체 살아가다 그냥 때가 되면 또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삶을 마감 할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정신 지체아가 자살을 하다니!
이해가 안 되었다. 왜 그랬는지 과연 그 애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그를 죽음의 세계로 밀어내었는가 하는 의문이 안 그래도 정리가 안된 머릿속은 또다시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버렸다. 약간 경증의 단순한 정신지체아로만 알고 있었던 아이였다.
그런데 다들 잠든 이른 시간 그는 혼자서 무엇을 생각하며 그 차거운 가을의 저수지를 향해 걸어 들어갔을까? 갑자기 머리가 깨여 자기 자신을 직시하게 된 것일까? 그래서 매일 같이 다람쥐 채 바퀴 도는 듯 한 나날에의 미미건조함이 느껴져 끔찍이도 싫어졌던건 아닐까?
아직 철이 안 들어서 인지 나는 이 생각 저 생각에 심지어는 그렇게 죽음을 택할 수 있는 아이가 부러울 정도로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산 사람에게는 시간이 흐르는 법, 그렇게 약 2년 정도의 생활은 청춘기에 한때의 회오리바람 마냥 기억의 저편으로 스쳐가 버렸다. 그리고 이 가을! 지금도 변함없이 떨어지는 단풍을 바라보며 한가하게(?)지난 세월을 돌이키다 보니 그 시절의 열병 같이
아프고 싫었던 몸살이 이제 조금은 그립기도 한걸 보면 나도 참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소년의 죽음이 잠깐 부풀었다가 터져 버리는 풍선처럼 허무한 것이 아니라 충만함이 가득한 또 다른 삶을 향한 몸부림 이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마치 낙엽이 언젠가는 새 생명의 자양분이 되듯이 그 외로웠을 아이의 영혼도 신의 자비 속에 다시 꽃필 수
있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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