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숙

늦은 밤. 원고지 칸을 메우다 말고 옆에서 자고 있는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꿈속에서조차 험한 길을 헤매는지 고통이 가시지 않은 얼굴에 힘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인다. 주름살이 자글한게 영락없는 할아버지다. 평소에 이이가 이렇게 맥이 없고 측은해 보인 적이 있었던가.


올 사월이면 결혼한지 30주년이 되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찬찬히 들여다 보기는 처음이다. 원래 고분고분하지 못하고 살가운 구석이라고는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 없는 내 성격이다.

그런데 다시 시집살이 만족하지 못하다고 남편에게 퉁명스럽게 대한 것은 사실이다.


사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조석한번 따뜻하게 차려주지 못하고 되는대로 외출복 한번 정성스레 다려 주지 못했다. 남편의 얼굴을 만져보며 미안한 표정으로 옛날 기억하나를 끄집어 낸다. 이십년도 넘은 얘기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그 속에서 생활의 진저리가 계속 되었다. 여러 날을 생각하다가 꾹 다물고 있던 입을 남편을 향해 열었다. 삼천만원만 마련해 주면 애들 데리고 대처에 나가 대학교까지 책임지고 교육 시키겠다고 제안했다.


이혼하자 친정으로 가겠다는 얘기는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이 집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교육 문제 밖에 없었다.

들은 척도 하지 않은 남편을 몇 날 몇 칠을 조르다가 드디어 폭탄선언을 했다. 여기 그냥 있다가는 교육이고 뭐고 할 수 없으니 맨 몸으로라도 아이를 데리고 나가겠다며 그 동안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말없이 않아 있던 남편이 험한 얼굴로 “기다려”한마디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의아해 하고 있는 내손에 제목이 약속 어음이었다.

그것도 애들 공책을 북 찢어서 자필로 쓴 어음. 남편의 이름과 액수는 30.000만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요구한 액수를 정학하게 쓴다면 3.000 만원이여야 맞는데 0이 하나 더붙어 있었다.


한참 만에 내 머리를 쥐어짜서 읽은 삼억만원이다.

순간 내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삼억만원이란 액수의 개념도 가늠하지 못하면서 현찰로 삼천만원 받았던 것 보다 더 좋았다. 그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기다려 내가 삼천만원 벌 때까지. 이자 충분히 쳐서 줄 테니까”남편이 내 손을 꽉 잡았다. 시부모님 밑에서 일만했다 뿐이지 단돈 십만원도 남편의 능력으로 마련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마음만 받아들이고 기다리기로 했다.


삼억만원짜리 가짜 어음으로 들뜬 내 마음을 고스란히 대출해 가고는 남편은 지금까지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그때 그때 순발력으로 이자까지 대출했다.

이십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짜 어음은 마음만 입금시켰다. 출금하는 적심 통장으로 변했다. 이젠 혼자보다 남편이 옆에 있어 의지하고 둘보다 자식들이 있어 여럿이 좋을 나이가 되었다.


평생을 불려 보려고 노력해도 불어나지 않는 적금 통장을 만들려고 애쓰지 말고 앞으로는 적심통장을 여러 개 만들어야 겠다.

백년해로의 부부 공동명의의 통장을 전제로 사랑과 희망 공경과 이해 포용과 화합의 통장 등등 날마다 하나씩 만들어도 모자르겠다.

내 마음대로 만들고 이자도 많이 불려서 주고 싶은 사람 아낌없이 주고 또 만들고....


그래도 남아서 이 다음에 삶을 정리할 나이가 되어 자식들에게 물려 줄 수 있다면 삼억만원의 적금통장보다 더 값진 유산이 되지 않을까.

 

<가섭산의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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