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화

 

비가 쏟아진다. 천둥이 울고 벼락이 친다. 혼자 어두운 밤을 보내고 있다. 외딴 집에서 장대 같은 빗줄기를 보는 마음이 까닭 없이 두려워진다. 문단속을 해야겠다 싶어 일어나는 순간, 난데없는 기척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이 아닌 유리창을 두드리는 바람에 놀라 보니, 청개구리 한 마리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아무리 봐도 비를 피해 들어온 모습 이였다. 먹구름과 천둥소리에 놀랐던 차에 불빛을 보고 찾아 들었을 것이다. 짐승도 굴속에 숨는다는 밤, 더구나 비까지 내리는 밤의 청개구리를 생각해본다. 놀러 나갔다가 비를 만났는지 혹은 거센 비에 집이 쓸려 이곳을 찾아든 것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빗속을 뚫고 온 절박함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잘못하면 추락 할 수도 있는 벼랑이었다. 그나 그뿐 안식처라고 찾아든 유리문마저 절벽이었으니, 얼마만한 절망이었을까. 더군다나 열리지 않는 문에서 벼락이 칠 때마다 버둥대는 것을 볼 때, 남편의 외출로 혼자임이 무서운것을 오늘에야 느끼는 것은 개구리의 노크로 더욱 크게 와 닿는다.


왠지 누군가 모자를 눌러쓰고 들여다보는 검은 물체가 나타날 것 같은 두려움이 온다. 저렇게 작은 개구리도 뱀에게 먹힐 때면 집 전체를 흔드는 큰 울림으로 외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먹히고 누르고 오르려고 하는 생존 경쟁에서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매달려 있는 개구리에게도 지혜를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개구리를 보고 있으려니 오래전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결핵을 앓았던 이십 여 년 전일이다. 지금 유리에 매달린 청개구리는 열 살도 채 안된 그때의 우리 아이들 모습 그대로였다. 퍼붓는 비에 경황없이 매달린 하얀 뱃살은 어리기만 했던 아이들의 창백한 손발을 보는 것 같은 느낌 이였다.


일 년이 넘은 투병생활 중에 수도 없이 죽음을 생각했다. 병도 병이지만, 약해진 마음에 지레 죽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아이들 문제가 걱정이었다. 막다른 지경에서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을 알았을 때는 절망은 곧 죽음의 그것이었다.


그 무렵 연잎에 앉아 있는 청개구리를 보았다. 우리 아이들 또래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 청개구리였다. 수많은 연꽃이 피어있었고, 이슬 맺힌 연잎이 그것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청개구리 한 마리 사뿐 올라 있는 게 한 폭의 그림처럼 고왔다. 얼마를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이어 소나기 한 줄기가 쏟아지면서 그림 같은 정경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거센 빗줄기에 개구리는 간 곳이 없고, 연못은 성난 물결에 휩싸였다.


그 이후 나는 더 심한 갈등에 시달렸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청개구리가 떠올랐다. 퍼붓는 비에 허둥대는 개구리처럼, 갑작스런 변고에 떨고 있을 철부지들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이들을 앉혀 놓고 유언 아닌 유언을 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통장과 도장이 든 지갑을 숨겨 놓고, 아이들에게 있는 곳을 일러주었다. 누가 물어도 모른다 하라고 일렀다.


그때의 깎아지른 벼랑에 선 듯 아득했던 마음이 아주 오랜 얘기처럼 심상해 온다. 그 절망과는 달리 지금까지도 살아 있는 데서 가슴 속 철 대문에 빗장을 지르고 살았던 내 삶에 그래도 아픔보다는 기쁘고 즐거웠던 기억이 더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노크하며 일으켜 주는 살 만한 세상에서 절벽을 오르는 개구리에게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해보자고 속삭여 본다.


어렵게 지내던 지난날을 생각하고 잘될 때에 겸손을 잃지 말자고 한번 노크하며 태어났으니 책임 갖고 잘 살아 보자고 말이다.

 

<가섭산의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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