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희

 

세상을 비추며 훤히 볼 수 있는 나는 햇살이라오. 하지만 내 마음은 한 곳으로만 쓰여 많은 것을 비추지 못하고, 많이 볼 생각도 아니 하는 작은 햇살이라네.


속리산의 능선을 넘실거리다가 산등에 납작 엎드려 있는 다섯 채의 집을 보았다. 그 중 두 집에는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난 한 번도 본적이 없다. 다소 고즈넉한 산골의 풍경에 마음을 뺏겨서 사람들이 ‘높은짐이’라 부르는 마을만 봄부터 비추고 있는 것이다. 내 몸을 잘게 부수고 더 부수어 빛을 보낸다. 봄빛이 닿자 높은짐이에 초록이 퍼졌다. 산비탈에 뿌리를 내렸어도 산에 업혀 있는 집보다 강해보이는 밤나무에도 잎이 돋아났고, 여름의 길목에 접어들면서 꽃이 피었다. 엷게 연둣빛 물을 들인 꽃무리가 땅으로 땅으로 늘어지려했다. 바람결에 꽃과 잎새가 부딪히고, 밤꽃내가 산골짜기에 퍼졌다.

밭을 갈고 있는 할머니도 밤꽃냄새를 맡았다. 할머니는 잠시 손을 놓고 밤나무를 쳐다보았고, 다음 날도 다음 날도 눈길을 주었다. 나 역시 할머니의 눈길이 가는 곳은 놓치지 않고 비췄다. 꽃이 지며 남긴 열매는 자연의 품에 안겨 실팍하게 영글었다.

추석이 다가 오자 산골의 모습이 분주해보였다. 금초를 하러 외지의 차들이 드나들었고, 할머니는 밭농사를 더 서둘렀다. 성묘객들이 밤을 탐낼까봐 조바심이 난 것이다.

산들 바람이 불면서 높은짐이에도 가을이 왔다. 할머니는 대나무 장대를 가지고 밤나무 아래로 갔다. 장대가 나뭇가지를 때릴 때 마다 툭툭 소리가 났고 밤송이가 떨어져 굴렀다.  두톨박이와 세톨박이, 도톨밤과 빈대밤까지도 줍는 할머니의 손등에는 주름이 많다. 할머니는 자루에 밤이 한 그득 차자 어깨에 들쳐 메고 집으로 갔다. 그리고 들마루에 밤을 쏟아 놓고 알이 굵은 것과 벌레가 먹지 않은 것을 골라 건조기에 넣어 두고, 그제 서야 손에 박힌 가시에 아파했다.

주말이 되자 젊은 부부가 할머니를 찾아 와 하루를 묵었다. 그들이 떠나는 길에 할머니는 건조기에서 말린 밤을 꺼내주며 절구공이에 콩콩 빻으면 살이 나오니 물에 불렸다가 밥을 할 때 넣으라고 당부하는 소리를 바람결에 들었다.

할머니는 밤꽃이 땅으로 늘어지던 날에 콩을 심었다. 땅을 파서 콩을 넣고 북을 돋우며 자드락밭을 매는 모습이 자신의 허리춤에 찬 낡은 다래끼 마냥 서러워 보였다. 콩은 여느 작물에 비해 손이 덜 감에도 할머니는 밭에 자주 갔다. 김을 맬 때도 있었고 콩밭을 돌아 본 뒤 밭에 앉아 있던 날도 있었다.

한로(寒露)가 가까이 오자 콩꼬투리는 가을을 닮아 갔다. 할머니는 콩을 거둘 생각이었지만 혼자 짓는 농사가 되고 보니 시기를 놓쳐 더러는 꼬투리가 벌어져 콩이 튕겨 나갔다. 그리고 밭에 주인보다 다람쥐가 먼저 찾아 왔다. 한발 늦게 밭으로 온 할머니는 다람쥐가 콩을 주워 먹는 것을 보고 ‘내가 힘들게 진 농산데... 네 놈이 먼저 먹는 구나’하며 다람쥐를 쫓아 버렸다.

할머니 댁에 먼저 왔던 젊은 부부가 찾아왔다. 할머니는 그들에게 다람쥐 얘기를 하며 ‘나는 속이 상한데 다람쥐란 녀석은 쫓겨나면서도 콩을 먹고 기분이 좋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가더라’고 말했다. 그리고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농사를 생각하면 지는 해가 아까워 저녁이 안 넘어 간다는 이야기를 나는 듣고 있었다.


나는 나이 드신 어머님이 안타까워 햇살이 되는 꿈을 꾸었다. 지는 해가 아깝다하시는 어머님의 목소리가 내 가슴을 후빈다. 주말이 되어야만 찾아가는 아들내외에게 어머님은 한 주 동안 거둔 곡식을 아낌없이 내어주시는데, 우리 부부는 고작 그간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값을 치르고 있다.

내 작아도 좋으니 한줌의 햇살이라면 어머님을 따라 다니면서 소소한 일도 같이 하고, 어머님이 수저를 일찍 놓는 저녁이면 밤을 새워 볕을 비 출 텐데...

오늘도 해는 서쪽 하늘의 노을 속으로 사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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