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반씨 세장지와의 깊은 인연

광주반씨가 처음잡은 마피골 터에는 지금도 종손이 살고있다.
광주반씨가 처음잡은 마피골 터에는 지금도 종손이 살고있다.
반기문 차기 유엔 사무총장 탄생과 관련 음성향토사학자 박종대씨가 반차기총장의 출생지인 음성군 원남면 상당 1리 일명 행치마을을 중심으로 한 광주반씨 세거지와 세장지를 중심으로 살펴본 지명 풍수를 본사에 보내왔다.

이에 본보에서는 박종대 향토사학자가 투고한 내용을 3회에 걸쳐 소개키로 했다.

- 편집자 주-


우리나라에서 세월이 가도 없어지지 않고, 항상 존재하고 있는 “감여가 사상”, 그 “도선비기”를 지은 신라고승 “도선대사”에서 비롯되어 고려에 와서 “일연선사”에 전수돤 “정감록”이란 비책은 조선에 와서 “무학대사”에게 전수된 책이다. 우리는 여기서 일연선사부터 무학대사에 이르는 그 기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음성박씨


성씨중에 음성지명을 사용한 유일한 음성박씨(陰城朴氏) 시조가 고려 고종때 몽고군이 쳐들어 왔을때 우리나라 3軍 모두가 항복했어도, 오뚜기처럼 패하지 않고 홀로 굳건하게 “귀주산성”을 지킨 박서장군(朴犀將軍)이다.

2년동안이나 몽고병이 온갖방법을 동원하여 공격해도 굳건하게 지킨 철성(鐵城)의 장군이던 귀재의 인물 박서장군은, 몽고군이 고종임금을 협박하여 어명에 의거 항복권유를 받고는 눈물을 머금고 항복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몽고에서 박서를 죽이려하자 조정에서 죽이지 않으려고 “귀향”이란 벌을 적용하였다. 고려때 “귀향”이란 “고향으로 돌려 보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을때까지 벼슬을 주지 않는” 무서운 형벌이었다. 죽을때만 기다려야하는 가혹한 형벌에 나이 40세의 젊은 피를 잠재울 수 없었다.

방랑길을 택한 박서장군은 이제 장군도 아닌 보잘 것 없는 한 사나이였다. 그런데 이듬해에 몽고군이 재차 침입하여 급해진 조정에서는 박서에게 문하시랑 평장사의 벼슬과 음성백(陰城伯)에 제수하며 회유하였으나 박서는 거절하였다.


그것은 나라를 위하여 바친 보답이 헌신짝처럼 팽개친 귀향벌이었는데 『나에게 정승을 준들 무슨 소용이랴』하며 불응하였다. 정감록을 전수받은 일연선사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일연선사가 박서장군에게 준 밀담(密談)이 있었으니,

“당신의 후대에 이 나라를 여는 열쇠가 나올 것이다”


이 말은 천기(天機)에 누설되는 일이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일연선사 말대로 기이한 인연으로 “조씨부인”을 만나 “백운거사”를 탄생시켰는데, 일연선사는 백운거사에게 정감록을 전수시키고 죽었으며, 정감록은 다시 백운거사의 수제자에게 전수되었다가 백운의 손자가 되는 “무학대사”에게 전수되었으니 무학이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한 것이 나라를 여는 열쇠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정감록은 전수되고, 박서장군이 잠든곳이 “동음암(冬音岩)”이라 이름 하였다.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의 옛 이름이 “동음암”이다.


정감록에 <앞을 내다볼줄 알으려면 소 울음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동음암”이란 바로 그 소 울음소리가 울지 못하고 잠자는, 겨울소리, 꽁꽁 땅에 묻어버린 박서장군의 혼을 잠재운 곳이다.

장군이 잠든곳을 입으로 전해지며 “동음암 박산솟골”이라 전래되고 있는데,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박씨 문중에서 재작년에 파보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경솔한지 <눈으로 확인하려 하지말고 전래되는 말을 믿으라>고 심심당부 하였건만 눈 앞에 보이는 현상을 확인하려는 인간의 얕은 마음이 천기심리(天機心理)에 거슬리지 않았는지 심히 염려스럽다.

세상 사람들은 미혹(迷惑)한 말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병들어 가는 것을 모른다.


□ 광주반씨 세거지


-광주반씨 최초 세거지-

봄은 말가죽골에 깊었고,꽃은 개머리산에 만발하다


다음은 광주반씨의 처음 세거지(世居地)를 살펴보자. 옛날 도선대사의 “도선비결(道詵秘訣)”에 말하기를, “봄은 말가죽골에 깊었는데, 꽃은 개머리 산에 만발하였다”

하였는데, 광주반씨가 처음 세거하게되던 임진왜란과 광해혼기의 때이다. 음성에 마피골(馬皮谷)이란 곳이 있었으니, 지금 음성군 원남면 주봉리 골짜기이다. 이곳 산수 수려한 곳에 반석권(潘碩權)의 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의 농장(農場)이 있었다. 민씨부인은 내금위 민승정(閔承貞)의 따님이신데, 부인의 농장이 이곳에 있었던 것은 시집올때 자기몫의 재산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당시 이곳에는 집들이 없었는데 이곳에 풀을 베고 소나무를 베어 집을 백여칸 지었다. 북쪽엔 네모진 연못을 파고, 흙으로 축대를 쌓고 정자 심어 소요자적하며낚시질하게 하였고, 뒷산 시루산에서 나물캐 반찬 삼게 하였으며, 두 그루의 잣나무 심어놓고 거문고 뜯으며, 덕령(德嶺)에서 불어오는 송풍(松風)에 시운(詩韻)을 얻고, 비파암(琵琶岩)의 물소리가 곡조(曲調)를 화답하는 풍류(風流)를 서로 다투어 흠모하였다 한다.


조선 명종때 학자로 설화같은 삶을 살다간 기인 남사고(南師古)는 역학, 풍수, 천문, 복서, 상법(相法)의 비결에 도통하였다. 그는 명종말년 즉 1575년의 동서분당을 예언했고, 명종19년에는 “내년에 기필코 태산을 봉하리라”하여 문정왕후가 죽어 태릉에 장사지냈으며, “살기가 심히 악하여 임진년에 왜적이 크게 쳐들어 올터이니 조심하라”하여 임진란을 예언하였다. 이같은 묘결(妙訣) 예언자가 소문을 듣고 이곳 “마피골”에 와서 지상(地相)을 살피기 위하여 패철을 놓고 두루 산수를 살피며, “기묘하다. 이 지국(地局)이여! 아름답다. 이 지격(地格)이여! 상용(祥龍)과 서표(瑞彪)가 左로 받들고, 右로는 걸터 앉았으니 자손이 점점 번성하게 뻗칠 징조요, 역마(驛馬)와 화개(華蓋)가 앞으로 달리고 뒤로 옹위하였으니 문장과 과갑(科甲)이 계속할 자리라. 이른바 길지중(吉地中)에 길지(吉地)이며, 복(福)있는 자의 복(福)될 곳이다.” 하였던 것이다.


□ 영춘현감 반석권


영춘현감 반석권(潘碩權)은 이곳에서 아들 한 사람을 두어 반사렴(潘士濂)이 선교랑(宣敎郞)이었고, 선교랑이 아들 형제를 두어 반인후(潘仁後), 반인경(潘仁慶) 형제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반인후공은 임진란에 의병장으로 선무원종공신3등에 책록되고 5형제를 두었고, 반인경공은 선조때 효우(孝友)로 암행어사 추천을 받아 군자감주부에 특제(特除)되어 8형제를 두었으니, 차기 유엔사무총장인 반기문장관은 반인경공의 14세손이시다. 특히 반장관님의 12대조이신 반충익 공은 화탄편작(醫術 第1人者)의 묘술(妙術)로 중생들을 구제(救濟)하여 이름이 중국에까지 퍼졌는데 어의(御醫)로도 활약하여, 반사무총장님의 할아버지는 고향 아랫마을 하당삼거리에서 한약방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마피골에서 살기 시작한 광주반씨는 이후 자손이 번성하여 邑의 동서로 분가되어 오정(梧亭), 가정(柯亭), 조촌(助村), 가산(佳山), 행치(杏峙), 보천(甫川), 적암(適岩) 등지에 터를 잡아 살게되었다. 반기문 차기 유엔사무총장님의 선대가 행치마을에 터를 잡게 된 것은 11대조 증통정병조참의 반윤림(潘潤霖)공을 세장(世葬)하던 숙종6년(1680년)부터이므로 3백년이 넘었다.

특히 이 행치마을엔 왕이 쏘내기를 피해 “왕두골(王逗谷)”에 머물렀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어느시대 어느 왕인지도 모른채 전설로만 전해오는 이야기이지만 그렇게 “왕두(王逗)”란 지명은 이곳에 남아 전설처럼 전해오는 오묘한 곳중 한곳이다. 이제는 이곳들이 광주반씨 세장지(世葬地)가 됐으니 어찌 우연이라하랴


<편집/이현정 기자>

 

<기획/향토사학자 박종대씨가 본 지명풍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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