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화

렌지 위에서 가쁜 숨을 쉬며 보리차가 끓고 있다. 커피 생각이 난다. 골방에 커피 잔을 들고 앉았다. 다른 사람은 쓴맛으로 커피를 마신다고들 하지만 나는 단맛으로 마시면서 창밖을 내다본다. 뒷산 숲에서 잠을 깬 조막막한 새들이 푸드득거린다. 밖의 풍경은 평화스럽기만 하다.


다시 새들을 바라본다. 어제까지만 해도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오늘은 새들도 눈부신 햇살 속에 나무아래를 보면서 조잘댄다. 여름이면 텃밭의 사과나무에 올라 앉아 풍성한 사과를 만신창이가 되도록 파먹었던 까치에 비하면 그래도 귀엽고 앙증스럽다. 새들이 날아오른 하늘을 쳐다보며 나에게도 날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계절이 겨울의 끝자락에 서 있을 즈음이면 더욱 더 바랑 메고 휑하니 떠나고 싶어진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다. 자연도 봄을 맞을 준비를 하는데 우리 식탁에도 봄을 초대하려 텃밭에 내려가 본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게에 달래나 냉이 몇 뿌리만 넣어도 집안에 봄내 음이 흠씬 고일 것이다. 아직 언 땅에 달래는 보이지 않고 꽃다지와 냉이가 고개를 내민다. 손을 대어보니 꺽 일 것 같아 그만두고 항아리 속의 호박고지를 집어 들었다. 지난 가을에 썰어 말려 놓았더니 된장의 건더기로 충분하다. 가을 채소를 말려 겨울에 먹는 것은 한국여인들만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몸은 현실에 있고 마음은 이상을 향해 뒤척일 때, 내 안에서 끝없이 일어났던 역마살은 나 자신을 찾기 위한 하나의 날갯짓이었다. 문학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쓰고 나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느끼는 절망감과, 힘들게 쓰고 난 뒤의 감미로움은 마치 씨소를 타는 느낌이다. 오늘도 나는 원고를 쓰다가 글이 막혀 답답함을 끓는 물 주전자의 울림과 멧새들의 지저귐으로 위안 받고 있다.


커피가 쓰듯 글공부도 쓴맛 단맛을 고루 맛보며 조금씩 향상한다. 처음 창작교실에 와서 공부를 하면서 글 세계도 인생사와 같아 고진감래해야 높이 날아오른다는 진리를 어렵게 배우고 있다.


봄이면 우리 밭에 씨앗을 뿌리 듯, 내 가슴에도 지금 문학의 씨가 싹트고 있다. 이 문학의 씨앗을 잘 키워 내 인생이라는 날개의 한 부분으로 만들 것이다.

봄을 기다리는 날갯짓은 눈부시고 찬란한 것인데도 이상하게 내 가슴은 써늘하다. 오십 평생의 긴 겨울 침묵을 깨고 빈약한 날개 하나만 의지하는 때문일까.


아름답게만 보이는 날개를 볼 때 ‘비익조’의 그것이 떠오른다. 몸도 반쪽이고 눈과 날개가 하나뿐이며, 같은 짝을 짓지 않으면 날 수 없다는 전설속의 새이다. 주로 부부의 금슬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나는 그것을 현실과 문학이라는 관계로 생각해 보았다.


문학은 현실을 전재로 가능하다. 특히 수필은 체험을 바탕으로 쓰는 글이라서 삶을 무시할 수가 없다. 비익조의 어설픈 날개가 온전한 하나를 꿈꾸듯 처음부터 완전한 상태에서 날 수 있는 그것보다 불완전한 존재의 만남으로 온전히 날 게 되는 그게 더 바람직한 삶이 아닐까 싶다.


항상 높은 자리를 다투지 않고 낮은 곳을 향하면서 이치에 맞는 과정을 만들고 싶다. 새들이 아무리 높이 난다 해도 쉴 때는 나뭇가지나 땅인 것처럼 문학과 이상의 뿌리를 현실의 바탕에 두면서 나의 역마살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게 스스로에게 충실해야 하는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나의 과제다.

조잘대던 새들이 무슨 기미를 느꼈는지 파란 하늘 속으로 날아간다.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들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가섭산의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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