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눈길 닿는 곳마다 화사한 신록인데 마음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2년 전에 나는 남편에게 목돈을 건네주겠다는 계획으로 편드형보험을 들었었다. 애초에 무리한 금액을 넣었던 터라 버겁게 햇수를 채운 후 수령할 기분에 들 떠 있었다. 마지막달에 보험이 전혀 다른 상품에 가입된 사실을 알았다. 그 후 두 달간 어떻게든 수습을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돈 잃고 건강까지 잃을 지경에 이르른 오늘 해약이라는 명목으로 연결고리를 끊으려한다. 통장에 들어온 돈을 기뻐하지 못하고 이자는 고사하고 원금에서도 빠진 900만원에 연연해하고 있다.

내가 힘들 때마다 마음의 지근에서 돌보아주는 친구와 해약을 하기 위해 보험사무실에 갔다. 친구는 차 안에서 기다리며, 상처를 나누기 위한 방법에 골똘해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는 거의 품을 듯한 자세로 경치 좋은 이곳 까페로 나를 안내했다. 위로해 주는 친구의 열정은 대단하다. 세 시간대로 접어들었지만 방금 마주하고 앉은 것처럼 반짝이는 눈빛에 미소를 머금은 그대로다. 입을 달싹이고 있지만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다. 사람을 저런 식으로 정성스럽게 대한다면 사람과의 관계가 좋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시를 들려주고, 예를 들어주고 하는 그녀는 연극 속 주연배우로서 나를 그 무대로 이끄는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한다. 그 안에서 함께 난장을 부리고 싶다.

내 손엔 오늘 아침 남편으로부터 받은 쪽지가 들려있다. 불경에서 나왔을 법한 심오한 그 쪽지를 10번도 더 읽었지만 건넨 이유를 모르겠다. 친구는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이런 철학적인 글을 대하면 쓴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진다고 했다. 하루 몇 시간씩 대화를 나누고 느낌까지 나눌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부하는 내 남편의 쪽지는 난해하기 그지없다.

‘인연의 인은 사람인(人)이 아니다. 인연이란 어떤 일을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의 인(因)과 간접적인 원인의 연(緣)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이 있어서 생겨나고 그것이 없어지면 소멸하기 마련이며 인연에도 생성과 소멸이 있다. 그러나 인연 역시 실재성이 부정되므로 모든 존재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다만 모난 것은 굴러가다 멈추니 머무름이 없이 살기 위해 마음에 모난 부분을 쳐내고 살자’

친구는 단어 단위로 짚어가며 해석을 해준다. 잘못된 인연은 빨리 끊어버리고 둥글둥글 살라는 것이란다. 그럴듯하다. 결론을 내리지 않고 뜻을 헤아리려는 나보다 결론을 내리고 뜻을 헤아리는 그녀가 더 산뜻하다. 매사 이런 식이다. 잘못된 줄 알았으면 빨리 처리하고 잊었어야 했는데, 결국은 해약하는 길밖에 없음을 알면서 이 궁리 저 궁리로 몸과 마음을 소모시켰다. 좋은 일을 즐겨야 하는데 언짢은 일에 매달려 살았다.

조용히 마음을 정리해 본다. 보험약관을 살피지 않은 나의 잘못이 크다. 그 점을 책망하지 않고 받아준 남편의 애틋한 정을 이제야 알겠다. 연락두절인 보험설계사에로의 미움이 쓸려간 자리마다 그것이 물살 되어 채워지는가 보다. 눈썹 밑에 눈물이 고인다. 남편과 나는 지금 각기 떨어져서 상대방이 받았을 법한 상처를 생각하고 아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터무니없이 믿은 나를 두고 친구는 남편의 울타리가 든든해서 그렇다고 한다.

친구는 오늘 모든 것을 체험한 사람처럼 내 마음 상태를 읽어가며 한 가지씩 말해준다. 나는 그 말들을 식탁위의 소박한 꽃에서 시작해 바로 창밖의 미루나무 잎에도 얹어놓고, 멀리 석양에 반짝이는 물결위에도 실어놓는다. 글 쓰듯 말하는 친구에게는 애잔하고 감성적인 남편이 있다. 대화를 즐기는 그들 부부는 30년 동안 살면서 서로에게 닮아있다는 생각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의 차는 또다시 악셀레이터를 깊게 밟으며 만세고개로 향한다. 길가의 길다란 축대에 양각해 놓은 유관순 누나와 순국선열의 만세소리가 귀청을 때리는 것 같다. 잠시 뒤에 도착한 3.1독립기념관 입구에는 태극기가 도열해 있는 병사처럼 서 있다. 그곳은 바람의 축제가 열린 것 같다. 바람에 씻기는 태극기에 나머지 슬픔 한 자락을 얹어 놓았다.

친구의 시나리오는 아직 끝이 아니다. 나무를 촘촘하게 심어 나뭇잎이 엉킬 것 같아 하늘이 보이지 않는 곳에 앉혀놓고 말이 없다. 벚꽃이 진 자리에 앙증맞게 맺혀있는 푸른 열매를 만져보고 미소한번 주더니, 방금 나를 집 앞에 내려놓고 떠났다. 그녀의 차 뒤꽁무니에서 미약하게 품어내는 하얀 연기를 보며 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인간지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더니, 그 친구 참 좋은 사람이다. 돈은 잃었지만 좋은 친구를 재발견한 오늘은 무지 행복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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