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숙

 -백두산 여행기 두번째-

윤동주 시비 앞에 섰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시인의 시비에 새겨진 서시중에서 유독 이 대목이 나를 고개 숙이게 한다. 과연 나는 얼마나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기를 열망 했는가. 온갖 부끄러운 짓 다 해 놓고 폭풍우 앞에서도 끄떡 않고 버틴 적은 없는가. 합장하여 절을 하곤 시인의 문학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들어서는 순간, 코를 움켜쥐고 눈물을 삼킨다. 시인의 생전에 일본군에게 당했던 사진들이 벽에 붙어 있다. 모진 고문과 열두번의 입옥과 출옥을 반복하면서도 끝까지 항변했던 시인! 결국엔 옥중에서 일본놈들 칼에 쓰러져 젊은 생을 마감한 윤동주 시인이다.

문단에서 흔히 한일합방 시대의 작가들을 항일작가와 친일작가로 나눈다. 또 친일은 하지 않았더라도 그 때의 시대적 배경이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은근히 친일작가를 미화 시킨다. 항일 작가들의 고초가 이토록 엄청난데... 다음 얘기는 하지 않겠다.

남학생 둘이 찍은 사진 앞에 눈길이 머물자, 깊은 한숨을 토해 내며 가슴을 움켜쥔다. 윤동주 시인과 문익환 목사의 대성중학교 시절 나란히 찍은 사진이다. 문 목사가, 생전에 죽음을 무릎쓰고 북한을 다니던 까닭이 여기 있었구나 생각하며 눈을 감는다. 나라를 위해 투쟁하다 비명에 간 젊은 친구를 차가운 땅 만주 벌판에 묻고 한시라도 발 편히 잠을 이룰 수 있었겠는 가.

현지 안내원의 얘기다. 옛날 대성중학교와 용정중학교, 용정 여중학교가 합해져서 지금은 용정중학교라고 부른다. 한국의 뜻있는 분들의 후원금으로 전원 장학금으로 공부한다. 연변의 한국 동포만 다닐 수 있고 중국인들은 다닐 수 없다. 졸업하면 해외 유학도 보내 준다. 용정중학교 출신들은 한국인으로의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문학관을 돌아 나오는길에, 남편의 손을 꼭 잡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당최 물건 사잔 소리 안 할 거지.” 몇번의 다짐을 받고 나서야 남편을 지갑을 열었다. 내 주머니도 다 털어 문우들에게 줄 시집 몇권 사고 나머지는 기부금으로 내 놓았다.

“감사 합니다. 인재 양성을 위해 뜻있게 쓰겠습니다. 문학관장 말에 일행들이 모두 지갑을 열어 기부를 한다.

초로의 무명작가가 젊은 시인의 초상화앞에 무일푼 여행자가 되었어도 마음은 기껍다.

시인의 절개 만큼이나 곧게벋은 해란강과 일송정 푸른솔자리에 세워진 정자, 황산리 항일 전투지 그밖에 이곳 용정땅 어디에든 시인의 넋이 함께하여 연변의 우리 동포들을 지켜 주기를 빌며 용정을 떠난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예사롭지가 않다. 우리가 지나고 있는 중국 땅은 끝 없는 벌판인데, 강 건너 북한 땅은 산악지대다. 산 꼭대기를 개간해 밭을 만들었다. 북한땅의 낮은 지대는 바위라 농사지을 곳이 없어 산꼭대기에 농사를 짓는다고 하다. 중국 쪽보다 북한쪽이 평야지대였으면 싶다. 그리하여 북한의 우리 동포들이 배불리 먹고 살았으면 좋겠다.

도문에 도착해 강가로 갔다. 강물이 흙탕물이다. 상류 지역에 난개발로 인하여 맑고 푸르던 두만강물이 황토물이라 한다. 대나무 뗏목을 타고 강 한가우데 국경 가까이갔다. 큰소리로 얘기 하면 들릴만한 거리에 북한 군인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부동 자세로 서있다. 그뒤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길을 간다. 현지 안내원에게 뭐하는 사람들이냐고 묻자 집단농장에서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 가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강물만 황톳물이 아니다. 맥없이 걸어 가는 북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황토빛이다.

<가섭산의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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