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질서를 잘 지킬 때 예절로 이어짐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경제를 병행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라 할 수 있고, 민주주의라 하더라도 법 테두리 안에서 모든 자유가 보장된다.
필자는 1977년 이후 일본을 비롯하여 미국,캐나다,영국,블란서,독일,호주,뉴질랜드 등 선진국과 몇 차례에 걸쳐 선진국, 후진국 등 22개국을 순방하면서 우리나라와 비교를 해 보았다.
그때 선진국들의 잘사는 모습은 너무나 부러웠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한가지 자랑거리가 있었으니 이 일이 바로 조상을 받들고 효친 경로하고 친족간에는 일가라는 씨족 관념으로 화합하는 것이 단일민족으로서 세계에서도 유일하게 자랑거리로 되어 있다.
비록 이 글이 10년, 20년 전에 일이지만 우리나라와 비교해 보기로 한다.
우리는 조국 광복과 6.25의 00를 겪으면서 역대 정부와 국민들이 심혈을 기울여 조국 선진화에 총 매진한 바 정치,경제,문화,과학,정보통신,국방외교,컴퓨터 인터넷 등 부문에 비약적 발전을 가져와 국민생활이 향상되어 서열이 중진국 수준에 머물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사회 상태에서 경제가 회복되어 GMP가 일만불에서 이만불로 올라간다 해도 우리는 선진국의 대접은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국민의식 수준이 선진국 국민들의 의식수준을 따라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진국 국민들과의 차이라면 그들은 비록 조상숭배와 경로효친하는 윤리관은 없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과 역사 속에서 민주화의 의식이 몸에 배여 있기 때문에 법을 존중하고 질서가 정연한 것이다.
필자가 20여년 전부터 외국에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몇나라 별로 적어 본다.

- 일본인들의 식단제

1977년 11월 당시 우리나라 상이군인회와 일본 상이군인회가 친선교류 협약에 의하여 일본00군인 회장 사사가와요 이찌씨로부터 8명의 회원들이 4일간의 초청을 받았다.
한국 상이군경회 최태호 회장은 필자를 8명 중에 통역사로 지명을 해 주었다.
11월 19일 예정대로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일본상이군인회 부회장 사끼 우찌씨외 3인이 환영을 해 주었다. 일행은 그들의 안내로 동경 시내 신쥬구 게이오프라자 호텔에 여장을 풀고 후루사도라는 고전 음식점으로 만찬에 초대되었다. 출입문에 들어서자 정원에는 대형 물레방아가 돌고 있었다. 안내자인 사끼 우찌씨가 60세 가량의 주인에게 인사 소개를 했다. 나는 명함을 주었다.
주인은 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벼루에 먹을 갈아 즉석에서 붓으로 명함을 써 주었다. 그러는 동안 서로 대화가 시작됐다. 그는 말을 하는 가운데 일본의 옛날 문물이 거의 한국을 통하여 들어왔다며 일본인으로서 이런 일을 모르는 사람은 바보라고 말했다.
식사 후 호텔로 돌아와 일행들과 이야기 하다보니 밤 1시가 넘었다. 그때 서울시 지부장 박춘식씨가 한국에는 통행금지 때문에 야경을 못 보았으니 통행금지가 없는 동경시내 야경을 보자는 것이다. 4인이 시내로 나갔다. 고요한 밤이라 인적도 없었는데 한참 후에 택시가 왔다.
택시기사가 "어디로 모실까요?" 하길래 우리는 "목적지가 없으니 그대로 갑시다" 얼마가지 않아 신호대 앞에 섰다. 야심하니 사람도, 차도 없이 우리가 탄 택시 하나 뿐인데 신호대마다 정지신호에 따라 차가 섰다. 우리나라의 기사들이 이렇게 교통규칙을 잘 지켜줄까 하며
감탄했다.
얼마를 가다보니 암흑 속에 불빛이 비치는 곳이 있었다. 1시30분이다. 일행이 접근해 보니 노점의 가끼우동 집이다. 일행은 출출한 판에 가끼우동 4그릇을 청했다. 1인분이 500엔이라고 했다. 우동을 먹기 시작했는데 찬이 하나도 없어서 "단무지라도 주시지요" 라고 했더니 단무지 값이 1인분에 100엔씩이라고 했다.
길가에 우동 장사가 박해서 그런지 그것도 식단제 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국민들로서는 예사로 보고 넘길 일이 아니었다.
1977.11.20 사끼우찌 부회장의 안내로 일본 상이군인회관으로 안내 되었다. 차에서 내리니 회관 앞 국기 게양대에는 일본 국기와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일본땅에 우리 태극기가 휘날리는 것을 보니 마음이 흐뭇했다. 접견실에서 일본 상이군인들이 정부로부터 대우받고 있는 복지 정책 현황을 설명 받았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혜택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국력이로구나 하고 탄식했다.
다음은 그들이 혜택을 받는 정부 부처와 해당 국회의원들을 소개 받기로 했다.
일행이 정부청사 앞에 갔을 때 시위대들이 시가행진을 하며 청사앞에 와서 청사를 향해 마이크를 대고 고함을 치며 지나갔다. 프래카드에 글을 보니 밀가루에 쌀가루를 섞는 것은 반대라는 것이다. 시위대 뒤에는 순사들이 몇 명 따라갔다.
그무렵 우리나라는 쌀이 부족하여 떡을 만드는데는 밀가루를 섞어서 하라는 지시였으니 우리나라와 정반대 현상이었다.
일행은 총리부 총무장관 후지다씨와 후생성 대신 와다나베 미찌오씨를 예방했다.
이어 후생성 관계 참의원과 중의원들도 접견했다. 이들은 한국의 방위는 일본의 방위라는 인사말을 빼놓지 않았다. 대신실이나 장관실은 으리으리 하리라고 생각을 했는데 예상외로 검소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 군수실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대신실이나 장관실이나 국회의원 접견실이나 차를 대접하는데 모두가 녹차였다.
일본상이군인회장 사사가와요 이찌(일본의 10대 재벌)씨 접견실에서도 역시 녹차였다.
3일째는 호리가와씨 일행의 안내로 일본궁성 맥아더 점령군 사령부 청사 NHK 방송국 명치신궁 센소지 등을 구경했다. 몇 일동안 동경시내를 돌아 다녔지만 휴지나 담배꽁초는 눈에 띄지 않았다.
다음날 일행 중 한 사람인 강씨는 형이 동경시내에 살고 있었다. 초청일자가 지나고 강씨 형님의 초대를 받아 가정집에서 신세를 졌다. 그 집도 녹차를 대접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녹차 재배 농민을 돕고 국민 건강을 위하여 정책적으로 녹차를 장려하고 있다고 했다. 일주일을 묵는 동안 호텔 커피숍이 아니면 커피 구경을 못했다.
강 사장네 집을 넓었다. 정원이 있어 적송 한 그루가 크게 자라 담장 밖에서도 잘 보였다.
주인 말에 의하면 당국에서 미관과 자연보호 차원에서 소나무를 잘 보호해 달라며 금년 처음으로 관리비 명목으로 7,000엔을 받았다고 자랑을 했다.
일본에서도 당시 몇 해전 의약분업이 실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정 상비약 정도는 약국이 아닌 화장품 가게나 슈퍼마켓 등에서 손쉽게 살 수 있다고 한다.
강사장의 안내로 아끼하바라 전자 상가에 가서 쇼핑을 하고 신깐센 열차 편으로 오사카로 갔다. 오사카 다이이찌 호텔에 여장을 풀고 이튿날 오사카성을 구경했다.
11월 24일 봉고차를 대절하여 00에 갔다 금각사 등 고궁을 구경하는 중 일행중 한사람이 얼굴색이 변하며 근심을 했다.
이유를 물으니 호텔 침대 이불 밑에 돈을 넣어두고 그냥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별도리가 없었다.
나라에 동대사 대불을 구경하고 방목하는 사슴은 거리로 나와 사람들을 따르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서둘러 오사카로 돌아와 숙소에 와 보니 침구는 손질했으나 돈은 그대로 있었다. 일행은 호텔종업원의 양심에 고마움을 느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 패전국이었지만 한국의 6.25 사변으로 경제 회복에 도움이 되었고 고위 관리들로부터 검소했다는 점과 법과 질서를 지킨다는 국민의식과 농민을 돕는다는 녹차 전용의 결심과 의약분업을 실시하였는데도 가정상 비약 정도는 가까운 슈퍼 등에서 손쉽게 살 수 있다는 점 등과 거리에서 휴지나 담배꽁초를 구경할 수 없을 만큼 국민의 준법의식이 강하다고 느껴졌다. 이 일은 24년전 이야기지만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참고 할 만하다.

-선진국의 팁문화

1979년 6월 국제라이온스협회 한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일행들과 같이 하와이를 갔다. 원주민 토인들이 있기는 하나 대세에 밀려나 있었다. 세계애서도 제일 인종이 다양한 곳으로 이름났으며 그러기에 인종의 차별이 없어 살기좋은 곳이라고 한다. 혼사는 인종 가릴 것 없이 둘이만 좋으면 쉽게 이루어 진다고 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 당시 진주만 공격으로 이름난 전쟁기념관이 있으며 파인애플 주산지며 와이키키 해수욕장으로 유명하다.
1979년 6월 미국 로스엔젤레스에는 당시 한국 교포가 15만이 살고 있는 인구 800만의 도시로서 일부 사막지대에는 석유도 생산됐다.
그 지대에는 비가 너무 오지 않아 부근 산천초목이 가을풍경을 이루어 가을 단풍을 착각할 수도 있었다.
유니버샬 영화제작소 디즈니랜드로 유명하다.
워싱턴은 미국의 수도이며, 흑인이 인구에 60%를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백악관, 국회의사당, 우주박물관, 알린턴 국립묘지, 워싱턴탑(165M)이 있으며, 이 탑이 시내 어디서나 보이게 하기 위하여 6층 이상의 건축허가는 규제되어 있다고 한다. 특히 이곳에 흑인들만이 사는 전용지역이 있는데 외지인이 모르고 들어갔을 때는 용서없이 소지한 금품은 물론 옷가지도 벗겨서 내쫓는 일도 있다고 한다.
미국은 부국이요, 살기좋은 곳이기도 하지만 가이드 말에 의하면 숙소에서도 문은 잘 잠그고 거리에 나갈 때는 한 두사람이 가지말고 몇 명씩 같이 다니라고 말하여 불안하기도 한 곳이라고 느꼈다.
뉴욕은 세계 제일의 도시로 유엔본부가 있고 엠바이야스데트빌딩(448m)자유의 여신상 맨하탄의 센트랄 파크 앞거리에는 미대륙을 발견한 콜롬부스의 동상이 있다.
시중 번화가에는 록펠러 재단의 70층,80층의 건물 28동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쓰인센타(세계 무역회관)은 110층 쌍둥이 건물로 인구 5만이라고 하니 건물의 크기는 가히 짐작이 간다.
팁문화에 대하여 선진 제국을 다니다 보니 팁은 세계가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음식값, 술값을 치를 때에 그 계산서에 서비스료가 들어있지 않았으면 손님이 따로 주어야 한다. 술값의 10%이다.
뉴욕에서 택시를 타고 미터기에 나오는 요금만 주니까 기사가 팁을 달라고 했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요금의 10%를 달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팁 문화는 독특하다. 맘만 내키면 술값 상관없이 부처주는 습관이 있다. 이는 허세에 불과하다. 시대에 따라 시정이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든다.
필자는 뉴욕 번화가 로터리에서 이상한 일을 보았다.
가로수 그늘 아래 앉아 있던 사람들이 택시 한 대가 와 멈추니까 뛰어나가 손에 들고 있던 마른 수건으로 택시의 먼지를 털어주고 기사로부터 팁을 받았다. 택시가 멈출 때마다 몇 명씩 뛰쳐나가 먼지를 털고 팁을 받아 갔다. 한참 보고 있자니까 가이드가 설명을 했다.
저분들의 신분은 지난날 대개 판사 또는 검사, 의사 출신으로서 심심하니까 자식들한테 용돈 신세 지지않고 친구들도 만나고 용돈도 벌고 하는 재미로 마른 걸레 하나씩을 가지고 나와 소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권력층에 있던 그들이 노후에 용돈이 없다면 현직에 있을 때 청백리였다는 것은 뻔한 일이다. 우리나라도 그런 청백리가 아쉽다고 생각했다.
하와이에서부터 항공편으로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워싱턴,뉴욕을 경유하여 버팔로로 왔다.
공중에서 본 미국은 아름다웠다. 넓은 들은 농경지 정리가 잘 되어 있었고, 주택의 정원, 녹지대의 정리, 어디가 공원인지 모를 정도로 전국토가 공원으로 보였고 시민들의 질서 의식이 높아 보였다.
농지는 광활하여 농가 호당 경작 평균 면적이 170정보라고 하니 상상도 못할 정도다.
버팔로에서 강 하나 사이에 캐나다 국경이다, 일행은 버스로 다리를 건너니 캐나다 나이야가라 폭포였다. 미국폭포와 캐나다 폭포로 나뉘어졌다는데 365m라고 하며, 미국쪽에서는 보이지 않아 관광객은 모두 캐나다 쪽에서 숙박을 한다고 한다.
캐나다에서는 가이드가 귀중품을 숙소에 두어도 도난 당할 염려가 없으니 안심하라고 일러주었다.
일행중 충주 사람이 한 사람 있었는데 친구에게 연락이 되어 터런터에서 80리 길을 호텔로 찾아와 주었다.
그 분 말에 의하면 자기는 사업이 잘되어 중류생활은 하고 있지만 우리 조국이 후진국이라 그만큼 무시 당하고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한국은 캐나다에서 구호물자를 보내주는 구호를 받는 나라인데 이제 한국에서 생산되는 신발 및 의류가 싸구려 시장에 나와 값도 싸고 실용적이라며 이제 한국을 개발 도상국이라고 칭찬해 주어 지금은 어깨가 으쓱해 졌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애국하는 마음은 해외 동포들이 더 강하다는 것을 느꼈다.
밤이 깊어 12시가 되니 국경의 도시답게 TV에서 국기 강하식을 하는데 미국, 캐나다 양국 국기가 나란히 내려가는 것을 보니 양국의 우호관계가 깊다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호텔에서 나이야가라 폭포 전경이 보였다.
참으로 대단한 풍경이었다. 그 규모는 미국 폭포와 캐나다 폭포로 나눠져 있으나 그 넓이는 365m이며 폭포의 높이는 약60m가 된다고 하며, 캐나다 지역에서 잘 보이도록 되어 있다.
그 규모는 세계 삼대 폭포의 하나이다.
1979년 6월 20일 캐나다 몬트리얼에서 국제라이온스협회 주최로 제62차 세계대회가 개최 되었는데 164개국 회원이 참가했으며, 그곳은 축제분위기였다.
한국은 캐나다 교민들이 한복을 차려입고 신랑은 사모관대와 신부는 족두리에 원삼을 입고 같이 참여해 주어 이채로운 면모를 보여 주었다.
전날 토런터에서 비행기를 타고 몬트리얼까지 오는데 비행기로 2시간이 걸렸지만 광활한 농경지의 끝은 보지 못했다.
농경지 규모가 바둑판 같았으며, 일정한 면적마다 농가한집씩이 들어 있었다.
세계에서도 가장 규모있게 잘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농가 호당 농지소유 평균 규모가 220정보라고 하니 그 대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과 캐나다 두 나라는 오랜 역사 동안 민주주의가 몸과 마음에 배여 생활화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였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지켜온 조상을 숭배하고 경로효친하는 미풍양속의 윤리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우리나라가 후진국이지만 윤리관만은 우리가 수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작권자 © 음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