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옥

오랜만에 충주에 사는 언니내외와 우리 식구가 고향 원주로 친정나들이를 가는 중이다. 멀미가 나 창문을 열었다. 아스팔트 양편에서 흔들리는 코스모스와 곱게 물든 나무들이 우리를 반긴다. 들녘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가을 햇살에 눈부시다.

며칠 전 개인택시를 지정 받은 형부는 신이 나는 모양이다. 트로트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장단에 맞춰 어깨를 으쓱이며 연신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십 여 년을 회사 택시만 운행하다가 그렇게도 소원하던 개인택시를 갖게 되었으니 하늘을 날 것 같은 형부의 기분을 알 것 같다.

친정이 가까워질수록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들이 정답게 다가온다. 예전에는 하늘만 빠끔히 보일만큼 숲이 울창하던 곳이다. 길이 좁아 반대편에서 경운기라도 오면 한 쪽이 비켜 줄 때까지 한참을 멈춰서야만 했다.

언니를 바라본다. 세월의 흔적일까. 삶의 여파일까. 곱던 자태가 많이 변해있다. 오늘따라 행복해 하는 언니의 모습이 소녀 같다. 돌아보면 쉽지만은 않았던 언니의 지난날이다. 가슴 한 켠이 아파왔다.

삼십여 년 전 늦가을 이었다. 집안 아주머니의 중매로 언니는 형부와 결혼했다. 충주 시내로 들어오는 초입 한옥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널찍한 마당에 꽃밭까지 있는 집이었지만 언니의 신혼은 유별났다. 중, 고등학생인 두 시누이들이 언니네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첫아이를 출산하여 집안일은 끝이 없었다. 따로 사는 시부모였지만 살림살이를 일일이 간섭하고 형부는 마냥 효자였으니 의지 처 없는 언니는 일하는 사람에 불과했다. 그 집안 어디에도 언니의 삶은 없었다.

사돈어른은 형부의 직장 정문 앞에서 기다리다 봉급까지 받아가던 분이었다. 할 수 없이 언니는 막일에 뛰어들 수 밖 에 없었다. 청순하던 언니의 모습은 점점 어두워가고 그 곱던 손은 거칠어만 갔다.

사돈어른은 무속인 이었다. 내가 첫 조카의 옷을 사들고 언니 집으로 갔을 때였다. 사돈어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갑자기 옷 봉지를 낚아챘다. 그러더니 귀신이 붙었다며 그 자리에서 불태워 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이가 없었다. 언니의 손을 끌고 그곳을 빠져나오고 싶은 것은 마음뿐, 나는 꼼짝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기억은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왜 사돈어른은 며느리 친정식구라면 도가 지나치게 미워한 것일까. 그 의문은 나에게는 미지수이다.

나쁜 일은 왜 혼자 오는 법이 없는 건지. 매서운 추위가 휘몰아치던 날 언니는 첫아이를 잃었다. 집 근처 공터에서 당한 교통사고였다. 자식을 잃은 어미 심정이 오죽할까마는 사돈어른은 모든 것이 며느리가 박복한 탓이라며 언니를 더 심하게 질책했다.

착하기만 한 언니가 왜 이리 힘든 길을 걸어야 하는지 나는 억울하고 화가 났다. 참으로 암담하고 질척거리는 늪이었다. 비 오는 날 걸어가는 울퉁불퉁한 황톳길과도 같았다. 고무신에 달라붙어 떼어내려 해도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찰흙, 몸보다 발이 더 무거워도 묵묵히 걸어야만 하는 길이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고통의 길을 벗어나게 한 것은 모성애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이를 잃고 실의에 잠겨있던 언니가 쌍둥이를 출산한 것이다. 언니는 아이를 생각하고 눈물을 닦았으며, 아이를 위해서 씩씩하게 잘 이겨냈다. 쌍둥이는 언니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쌍둥이가 있어 언니는 “전설의 고향”보다 힘든 고비를 잘 넘기도 오늘과 같은 기쁜 날을 맞은 것이다.

험한 산도, 건널 수 없을 것 같던 깊은 강도 젊은 시절에 넘치도록 건넜으니 이제는 언니 앞에도 편한 길만 있었으면 좋겠다. 나지막한 산과 고요히 흐르는 강이라면 형부와 쌍둥이 예쁜 두 조카와 함께 티격태격 해가며 작은 행복을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저세상에 계신 사돈어른도 생전에 못다 준 사랑에 후회하며 지금 피붙이의 행복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 않을까.

멀리 친정 동네가 보인다. 길은 끝나는 곳에서 다시 시작되고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지만, 언니가 묵묵히 걸어 오늘을 맞이했듯 나 또한 내 삶이 인도하는 길을 기쁘게 서두르지 않고 걸어 갈 것이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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