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자

주방이라면 기본으로 서너 개의 냄비가 층층이 쌓여있거나 얹혀 있다. 국 냄비, 찌개냄비, 전골. 부침냄비 등 크고 작은 모양이 제각각이다. 우리 집 냄비 가족 중에는 만날 때마다 추억을 새롭게 일깨워주는 냄비세트가 있다. 물마를 날이 없이 고달프게 식구들의 입맛을 돋우어 주기위해 내 손길에서 몸살을 앓는 소장품이다. 이전에 쓰던 냄비들은 뒷전에 비켜 앉아서 실직자처럼 빛을 잃고 먼지를 쓰고 있어 가끔씩은 닦아서 광을 내주면 벙실벙실 웃는 듯 내 얼굴이 아른거린다.

수년전에 쓰레기 매립장 옆 관사에서 살고 있었을 때였다. 하룻밤만 자고나면 온갖 쓰레기가 산더미 같이 쌓이는데 음식쓰레기로부터 시작해서 가구. 전자제품 온갖 생활용품이 쓸 만한 것이 가려지지 않은 채 매몰되었다. 흙속으로 묻히는 쓰레기들의 몸부림은 억울하다는 자성의 소리로 가슴 아리게 들리기도 했다.

아침마다 쓰레기장을 순회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던 어느 날. 어느 댁이 이사를 하면서 버린 것인지 모르지만 주방 그릇이 한 리어카가 넘게 버려져 있었다. 그 중에 라면 한 봉을 끓일 수 있는 크기에서부터 층층의 냄비 세 개가 유리 뚜껑이 덥힌 채 있어 내 눈길을 머물게 했다. 냄비는 더럽혀져 있었지만 내가 쓰고 있는 냄비보다 값어치가 있어 보여 누가 볼세라 도둑질 하듯 주어서 씻어보니 두꺼운 알루미늄 소재로 된 경질의 고급냄비였다. 내부엔 검게 피박처리가 되어있고 겉은 빨간색으로 코팅이 되어있어 보기도 좋았다. 뚜껑은 특수 유리로 노란 색의 격자무늬가 그려져 있어 촌스럽지도 않다. 이런 냄비를 왜 버렸을까? 그 사람은 얼마나 더 좋은 냄비를 샀기에 미련 없이 버렸을까?

얼마 전 삼중 바닥의 스테인리스 냄비 세트를 샀는데 이보다도 고가의 냄비였다고 생각이 든다. 주인은 냄비가 낡아서 버린 게 아니라 싫증이 나서 버렸다는 어림짐작에 버려진 냄비에 애착이 간다. 때때로 쓰레기장에서 쓸 만한 그릇을 주어서 혼자 사는 노인이나 경로당에 깨끗이 닦아서 주면 고맙다며 “흔한 것도 죄지?”하며 혀를 차는 할머니도 있다. 아껴쓰고 다독이는 알뜰한 멋이 사라진지도 오래고 양말은 기워서 더 오래 신는다고 했지만 한 구멍. 한 올만 터져도 무조건 버려지는 것이 현실이다. 버리는 인심은 후하고 나누며 사는 인심은 각박하다. 그래서 물질만능시대라고 하는지 모르지만 있을 때 절약해야지 없을 땐 아낄 것이 없어서 못 아꼈던 그 시절을 너무 쉽게 잊는 건 아닌지?

길들은 그릇은 새것보다 다루기가 쉽고, 헌옷을 입고 일하면 몸이 편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주워 온 냄비가 쓰기가 편해서 좋고 헌옷을 입고 일하면 더렵혀져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비싼 그릇이나 옷은 찬장이나 옷장에서 유행이 지나서 값나게 쓰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쓰이는 곳이 없으면 버려졌던 냄비만도 못한 것이 되리라. 첨단 기술로 주방 기구들도 발달되어 냄비의 종류만 살펴봐도 다양하다. 철에다가 유리를 씌운 법랑 냄비는 뚝배기 대용으로 쓰이고, 중금속 방지를 위한 유리냄비는 한방차를 다릴 때 좋고, 철이나 크롬을 섞어 만든 스테인리스 냄비는 갈비찜이나 곰국을 끓일 때 쓰고 , 아연. 나철로 만든 양은냄비는 계란 삶을 때 쓴다. “흔하면 천하다” 라고 했던가. 물질적으로 풍부하면 그에 비례해서 손실도 감내해야 되는 걸까.

옛날에는 냄비가 흔하지 않아서 흙을 구워서 만든 뚝배기가 그 역할을 했고, 무쇠 솥 뚜껑을 뒤집어 삼발이 위에 얹어 놓고 불을 떼서 부침개나 전을 부쳐서 먹던 때가 먼 옛날 같이 그리워진다.

냄비 삼형제가 가스레인지 불판에 앉아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짜글짜글 태워도 타지 않고 요리가 잘 만들어지고, 손잡이에 기름때가 끼어있어도 정이 가는 냄비형제들이다.

스텐냄비는 불을 붙이면 금새 타버리지만 이 냄비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져 있어 닦을수록 뽀얀 속살을 내보이며 센 불에서도 타지 않는다.

내 손에 온지도 십년이 넘었는데도 새 냄비보다 좋다. 까다로운 딸들도 버리라는 말을 하지 않고 즐겨 쓴다. 우리 집 주방에서 꼭 필요한 냄비삼형제가 자랑스럽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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