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두 사람의 죄수가 교도소 창문으로 밖을 보고 있다. 한 사람은 담장 옆의 진흙을 또 한 사람은 밤하늘의 별을.’

힘들 때마다 이 글귀를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또한 용기를 얻는다.

똑같은 처지에서도 달리 보이는 시각과 나쁜 조건도 어떤 사람에게는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본다.

같은 별이지만 그 때는 또 얼마나 밝을지도 생각한다. 보는 시점에 따라 바뀐다는 건 어둠으로 달라지는 빛의 밝기를 드러낸다. 포기할 수 없다면 열심히 사는 것도 상책인 탓이다.

며칠 전 유난히도 잠 오지 않을 때의 일이다. 책을 펴 들어도 내용은 겉돌고 바람을 쐬고 들어와도 그 때뿐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도 소리는 빗나가고 눈꺼풀은 천근으로 무거워진다. 어떻게도 할 수 없어 낙서를 하다 보면 한 글자만 계속 써 대고 있다.

창문을 열어 보니 겨울비까지 뿌렸다. 얼마 후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흐린 채였다.

날씨마저도 나를 편들지 않는가 싶어 더욱 짜증스럽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은 별이 나타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다. 새벽달조차 지운 지 오래인데 왜 혼자 남아 있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혼자가 아니었다는 생각에 우선 반가웠다. 벌레처럼 웅크려 있던 내게도 지켜보는 눈길이 있었나 싶어 마음이 가벼워진다.

별이 나를 위해서만 빛난 것도 아니고 본 사람도 많았을 텐데 그렇게 여겨진 것이다.

창문을 통해 들어 온 신비 또한 마음의 향방을 제시해 준 것처럼 느껴졌다. 닫혀 있었다면 보지 못했을 테니 절망 속에서도 창문을 연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힘들 때 어두운 면을 보는 건 당연하지만 그럴수록 자기를 채찍질해야 되지 않을까.

단련을 해야 연장이 되듯 시련을 거쳐야 원만한 인격이 형성된다.

구름이 아니면 단비가 내릴 수 없는 것처럼 힘들다고 절망하는 건 무책임한 자신을 드러낼 뿐이다.

문제의 죄수가 마음이 편해서 별을 보았을까.

아니다. 진흙을 본 죄수보다 더 절망한 까닭에 볼 수 있었다.

지금은 흐리지만 별이 뜰 것을 알았기에 즐겁게 기다릴 수 있었다.

또 한 사람의 죄수는 눈앞에 전개된 것만 보면서 진흙에만 집착했으니, 같은 상황에서 전혀 다른 걸 보게 되는 배경은 그렇게 단순했다.

별을 보든 진흙탕을 보든 자기 몫이지만 그로써 달라지는 결과를 보면 허투루 볼 수 없다.

두 사람의 앞길이 어떻게 바뀔지도 빤한 게, 별을 본 죄수에게는 푸른 하늘이 있지만 진흙을 본 사람에게는 내일이 없다.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대처하는 자세는 달라진다.

하나가 운명에 끌려가고 다른 하나가 주도권을 잡는다면, 그 때 진흙이 아닌 별을 보게 된 것 또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경건한 자세를 잃지 않는 한 비춘다면 별과 함께 크는 소망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깊은 밤 별 하나에 힘을 얻듯이 나 역시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다.

내 마음에도 창을 낼 때가 된 것일까.

닦지 않은 창문이라면 모처럼의 별도 희미하게 비치듯 어떤 일이든 내게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했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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